학봉(鶴峯) 고인후(髙因厚) 묘소(墓所)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14-11-05 08:56
조회
4830
1561(명종 16)∼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 의병장.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건(善健), 호는 학봉(鶴峯). 의병장 고경명(髙敬命)의 아들이다.
1577년 진사시에 합격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學諭)에 이어 승문원정자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관군을 이끌고 북상, 공주에 이르러 선조가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 귀향시켰다. 이때 광주의 향리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이들을 다시 모아 형 고종후와 함께 수원에 진을 치고 있는 정윤우(丁允祐)에게 인계하고 행재소로 가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귀향 중에 북상중인 아버지의 의병 본진과 태인(泰仁)에서 합류하였다.
의병이 여산(礪山)에 이르러 황간(黃澗) · 영동(永同)의 왜적이 장차 전라도로 침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 휘하 장사들이 본도를 염려하여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북쪽으로 정벌할 것을 청하자 고경명은 여러 장수의 의견을 따라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겼는데 당시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고경명이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다.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물러나자 고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적병을 성 밖에서 포위하고 성 안에서는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館舍)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다시 방어사와 같이 성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고경명 의병은 서문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북문을 공격하니, 관군의 선봉장 김성헌(金成憲)이 먼저 도망치자 관군이 크게 패하였다.
고경명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일제히 활을 당기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의병이 급히 부르짖기를 ‘방어사의 군사가 패하였다.’고 하자 대오가 무너져 흩어졌다. 고경명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자 종사관 안영(安瑛)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주어 타게 하고 도보로 따라갔다.
종사관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대장이 나오지 못함을 알고, 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하여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이에 고경명이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하였다. 팽로가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안영과 함께 고경명을 보호하다가 적중에서 함께 전사하고 고경명의 차자(次子) 고인후도 달려가 싸우다가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나라에서는 1629년(인조 7)년에 숭록대부영의정에 증직하였고, 1688년(숙종14)에 사절(死節)한 고인후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라고 명하였으나 이행이 되지 못하고 있다가, 1694년(숙종 20)에 증영의정 고인후에게 의열공(毅烈公)의 시호가 주어지고, 1786년(정조 10)에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명하였다.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모셔 제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