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유씨 처녀가 묻힌「각시무덤」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13-04-24 08:47
조회
6869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의 모래재에 있는 묘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사람들이 ‘각시무덤’이라고 부르는 무덤은 소이면의 소재지인 대장리에서 서북쪽으로 1㎞ 떨어진 모래재라는 고개 중턱에 있다. 이 무덤은 조선 중기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 살던 청주고씨 집안의 고이후(髙以厚)와 혼인을 앞두고 죽은 고흥유씨 처녀가 묻힌 곳이라고 전한다.
1982년에 출간한 『내고장 전통가꾸기-음성군-』과 2005년에 출간한 『음성의 구비문학』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인 인조 초에 소이면 후미리에 사는 유참봉에게는 용모가 단정하고 마음씨도 착해서 마을 사람들의 칭찬과 귀여움을 한몸에 받는 딸이 한 명 있었다. 유참봉 딸의 소문은 인근에 자자해서, 혼기가 차자마자 근동에서 제법 산다는 집안에서 혼담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참봉 눈에는 어떤 집안의 총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혼담이 들어오는 족족 퇴짜를 놓다 보니, 어느새 유참봉의 딸은 스물한 살이 되었다. 당시의 사회 풍조로는 노처녀 소리를 들을 나이였다.
그런데 때마침 유참봉과 친분이 있는 신씨가 중매를 하여, 원남면 마송리에 살고 있는 고흥유씨 집안과 연이 닿게 되었다. 신씨가 주선한 신랑될 사람은 훈련원주부를 지낸 고응연의 열여덟살 된 손자로 이름은 고이후(髙以厚)였는데, 기상이 늠름하고 체구가 당당하며 대장부다운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양가의 합의에 따라 사주택일을 한 뒤 혼사 준비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유씨 처녀가 심한 열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결국 두 집안사람들과 중매를 섰던 신씨가 상의하여 유씨 처녀의 장사를 청주고씨 집안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후미리를 떠난 상여가 비산리모래재에 와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려고 할 때였다. 상여꾼들이 아무리 힘을 써도 상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상주인 고총각이 상여를 어루만지며, “천명을 다하고 이제 시집으로 가는데 어찌 발길을 떼지 않으시오. 앉은자리가 명당이라면 그 대답으로 발길을 떠보시오.” 하니까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
유씨 처녀의 뜻을 알게 된 고총각은 집안어른들과 상의하여 상여가 멎었던 자리에 무덤을 마련하여 주었는데, 알고 보니 신묘하게도 그자리가 명당자리였다. 그후 상을 마친 삼 년 뒤 고이후는 성균관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이어서 세마(洗馬)에 추천되었으나 사관에 응하지 않고 향리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하여 그를 따르는 선비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이후는 평생을 두고유씨 처녀를 생각하며 즐거운 감정을 외부에 표현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고씨 문중에서는 유씨 처녀의 묘를 벌초하는 등 관리하고 있다고 하며, 근처 마을 사람들은 비록 혼인을 치르고 죽지는 않았지만 고씨 집안과의 인연을 생각하며 이 무덤을 ‘각시무덤’이라 부른다고 한다.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사람들이 ‘각시무덤’이라고 부르는 무덤은 소이면의 소재지인 대장리에서 서북쪽으로 1㎞ 떨어진 모래재라는 고개 중턱에 있다. 이 무덤은 조선 중기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 살던 청주고씨 집안의 고이후(髙以厚)와 혼인을 앞두고 죽은 고흥유씨 처녀가 묻힌 곳이라고 전한다.
1982년에 출간한 『내고장 전통가꾸기-음성군-』과 2005년에 출간한 『음성의 구비문학』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인 인조 초에 소이면 후미리에 사는 유참봉에게는 용모가 단정하고 마음씨도 착해서 마을 사람들의 칭찬과 귀여움을 한몸에 받는 딸이 한 명 있었다. 유참봉 딸의 소문은 인근에 자자해서, 혼기가 차자마자 근동에서 제법 산다는 집안에서 혼담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참봉 눈에는 어떤 집안의 총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혼담이 들어오는 족족 퇴짜를 놓다 보니, 어느새 유참봉의 딸은 스물한 살이 되었다. 당시의 사회 풍조로는 노처녀 소리를 들을 나이였다.
그런데 때마침 유참봉과 친분이 있는 신씨가 중매를 하여, 원남면 마송리에 살고 있는 고흥유씨 집안과 연이 닿게 되었다. 신씨가 주선한 신랑될 사람은 훈련원주부를 지낸 고응연의 열여덟살 된 손자로 이름은 고이후(髙以厚)였는데, 기상이 늠름하고 체구가 당당하며 대장부다운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양가의 합의에 따라 사주택일을 한 뒤 혼사 준비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유씨 처녀가 심한 열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결국 두 집안사람들과 중매를 섰던 신씨가 상의하여 유씨 처녀의 장사를 청주고씨 집안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후미리를 떠난 상여가 비산리모래재에 와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려고 할 때였다. 상여꾼들이 아무리 힘을 써도 상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상주인 고총각이 상여를 어루만지며, “천명을 다하고 이제 시집으로 가는데 어찌 발길을 떼지 않으시오. 앉은자리가 명당이라면 그 대답으로 발길을 떠보시오.” 하니까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
유씨 처녀의 뜻을 알게 된 고총각은 집안어른들과 상의하여 상여가 멎었던 자리에 무덤을 마련하여 주었는데, 알고 보니 신묘하게도 그자리가 명당자리였다. 그후 상을 마친 삼 년 뒤 고이후는 성균관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이어서 세마(洗馬)에 추천되었으나 사관에 응하지 않고 향리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하여 그를 따르는 선비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이후는 평생을 두고유씨 처녀를 생각하며 즐거운 감정을 외부에 표현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고씨 문중에서는 유씨 처녀의 묘를 벌초하는 등 관리하고 있다고 하며, 근처 마을 사람들은 비록 혼인을 치르고 죽지는 않았지만 고씨 집안과의 인연을 생각하며 이 무덤을 ‘각시무덤’이라 부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