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원(髙宗遠) 형제의 활약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14-10-27 08:54
조회
5449
시 대 : 조선
지 역 : 강원도 영월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219호
임진왜란 때 강원도 영월에서 의병을 모아 왜구에게 대항한 고종원 형제에 대한 이야기.
강원도 영월군 진별리에 고종원, 고종길, 고종경 삼형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1592년 왜구가 쳐들어와 계속 승리하며 북진하고 있었다. 그해 6월 29일 삼형제는 영남지방의 김성일과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감격한 바 있어, 자신들도 강원도 각 읍에 통문을 돌려 군량과 병기 및 쇠를 모으고 청장년을 모집하였다.
이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강원감사 유영길은 고종경에게 새로 모집한 관군 오백 명을 주어 흥원진까지 통솔해 가기를 명하였다. 흥원진은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지역으로 일본군이 남한강을 건너는 관문이었다. 군사를 통솔하여 가는 도중 고종경은 일부 도망친 군사들을 대신하여 다시 군사를 모으고 이끄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서 제 시간에 흥원진에 도착하지 못했다.
강원감사 유영길은 사정은 가상하지만 군율을 어겼다고 해서 사형을 집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영월의 백성들이 “위급 존망의 날을 당하여 무죄한 의사 한 명을 죽이는 것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사면을 요청했고, 영월 군수 권두문이 이러한 사정을 원주 감영에 보고했지만 길이 막혀서 제 시간에 가지 못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감사 유영길은 고종경을 사면한다고 하였으나 이미 사형이 집행된 후였다. 유영길은 바로 파면당하였으나 영월 사람들은 고종경의 부당한 죽음을 보고는 의병에 참여하길 꺼려하여 모두 흩어져 버렸다. 군수 권두문은 평창군 응암리 전투에서 패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영월은 이로써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을을 내주게 되었다.
고종경의 형제 고종원과 고종길은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노리곡굴로 피난했다. 1592년 8월 17일 왜군은 강원도 영월까지 진입하여 남아 있는 농민들을 협박하여 피난민이 숨은 곳을 알아냈다. 18일 왜군은 뗏목을 타고 진별리 강을 건너 노리곡으로 집결하여 피난민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노리곡굴 입구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고종원의 아내 조씨 부인은 노리곡굴 안에 있는 연못에 투신하여 자결하였고 고종원 형제는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 굴 밖으로 나와 포로가 되었다. 두 형제는 모진 고문을 당해도 결코 투항하지 않았다.
9월 1일 두 형제는 폭우가 심한 밤을 틈타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영월로 돌아가던 길에 고종길은 잡혀서 죽고, 고종원은 포로가 된 지 이십 여일 만에 풀려나 영월로 돌아왔다.
고종원은 4월 20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9월 6일까지의 피맺힌 사건을 《기천록》에 기록해 놓았는데, 이 책은 임진왜란 때 강원도 의병의 면모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고종경의 억울한 죽음과 당시 백성들이 전쟁에 임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대항하려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된 영월 고씨동굴(髙氏洞窟, 천연기념물 제219호)은 고종원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신하였던 동굴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 상세설명
고종원(髙宗遠) 153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근(士近), 호는 화수, 화전군파(花田君派) 인비(仁庇)의 10세손이며 안릉참봉(安陵參奉) 광후(廣後)의 3남으로 중종 33년(1538) 5월 18일 출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