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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열녀(烈女) 고경춘(髙瓊春)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15-01-20 09:01
조회
4393
-죽음으로 정절지킨 기생...현대여성에 귀감

영월이 낳은 열녀 고경춘(髙瓊春)(1758~1772)의 순절비(殉節碑)는 사람들의 무관심속에서도 쪽빛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굽이쳐 흐르는 동강의 기암절벽 위에서 200여년을 꿋꿋하게 견디어왔다. 동강은 금장강(錦障江)이라는 옛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자연 생태계의 보고일 뿐만 아니라 금강정(錦江亭), 낙화암(落花巖), 어라연(漁羅淵) 등 조상들의 역사적 발자취와 뗏꾼들의 삶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 있는 곳이다. 또 경춘 순절비가 있는 금강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 너머 덕포리(德浦里)는 경춘의 생가가 있었던 마을로 예부터 자연 경관이 빼어난 이 곳의 풍광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강 건너에는 상덕촌이라는 마을이 있어 초가집과 울타리가 뽕나무 사이로 숨었다 보였다 하고, 그 남쪽 밀적포에는 나무가 울창하여 마을의 연기와 물기운이 은은히 가리우고 어른거려서 그곳을 바라보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조선 후기 영조 임금 때 영월에 고순익(髙舜益)이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늦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 근심을 하였다. 이들 부부는 매일 아침 태백산 산신령에게 자식을 점지해 달라며 백일 기도를 드렸다. 영월은 단종의 유배지로 이 곳 사람들은 옛날부터 숙부인 세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태백산 산신으로 신격화(神格化)하고 그 영험함을 믿어 지금까지도 마을 수호신으로 숭배하고 있다.

그 후 고순익은 예쁜 딸을 얻었으며 단종(노산군, 魯山君)이 점지해 준 소중한 자식이라 하여 노옥(魯玉)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노옥은 어릴 때부터 용모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예의범절이 뛰어나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러나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3년 후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어린 동생과 함께 어렵게 생활하였다. 의지할 곳이 없었던 노옥은 이웃에 살던 추월이라는 기생의 수양딸이 되었다. 그러나 추월이조차 나이가 들어 생활이 넉넉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기생이 되고 말았다. 뛰어난 미모와 가무 솜씨를 가진 그는 경춘(瓊春)이라는 기명을 갖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그녀에게 주위로부터 많은 유혹이 있었으나 항상 몸가짐을 깨끗이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영월 부사 이만회(李萬恢)의 아들인 시랑(侍郞) 이수학(李秀鶴)이 경치가 빼어난 금강정(錦江亭)에 놀러왔다가 강 건너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경춘을 보았다. 경춘의 미모에 반한 시랑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백년가약을 약속하며 사랑을 고백하였고 결국 두 남녀는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1772년(영조 48년) 7월 29일 이수학의 부친이 한양으로 영전되니 이들의 깊은 사랑도 더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이수학은 과거에 급제한 후 꼭 찾아오겠다고 언약한 글을 남긴 채 한양으로 떠났다. 그 후 경춘은 매일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을 꼭 데리러 오겠다던 이시랑을 기다렸다. 이 때 `관산융마(關山戎馬)'라는 시로 유명한 당대의 문장가인 석북(石北) 신광수(申光秀)가 영월 부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영월의 이름난 명승고적을 찾아다니며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는데 이 때 지은 시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소쩍새 우는 소리를 듣고 夜 間 子 規 有 感

 영월 깊은 산 속에 소쩍새 우는 소리 越 絶 深 山 蜀 魄 聲

 네 어찌 괴롭게 울어 삼경까지 지새는가爲 何 성 若 到 三 更

 꽃 사이에 피울음을 이제 토하지 말라 如 今 莫 吐 花 間 血

 만가지 장릉의 한이 풀린 지 오래일러라.萬 事 莊 陵 限 巳 平

신임부사는 경춘의 미모에 반하여 수청을 들도록 강요하였으나 경춘은 이시랑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영월 부사는 곤장을 치면서 수청을 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경춘은 부사에게 몸을 깨끗이 한 후 며칠 뒤에 수청을 들겠다고 거짓으로 말한 후 관아에서 풀려나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 울면서 하직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이수학이 한양으로 가며 준 사랑의 증표를 몸에 지닌 채 낙화암 절벽에서 몸을 던짐으로써 16세의 어린 나이로 목숨보다 더 소중한 지조를 지켜낼 수 있었다.

`영월부읍지(寧越府邑誌)' 선생안(先生案)의 기록에 의하면 “신광수는 임진년(1772년, 영조 48년) 9월 25일 영월부사를 제수받고 10월 21일에 부임하여 계사년(1773년, 영조 49년) 12월에 고과 심사(考課審査:정기적인 감사) 점수가 좋지 않아서 교체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승정원일기' 1773년 12월조에도 “영월 부사 신광수(申光洙)는 지난날의 속되고 모진 잘못으로 파면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춘이 금강정에서 투신한 후에 영월 부사 신광수도 삭탈관직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경춘이 순절한 지 24년이 지난 1795년(정조 19년)에 순찰사 손암(遜岩) 이공(李公)이 영월을 지나는 길에 경춘의 절개를 듣고 “미천한 신분인데도 이는 진실된 열녀라 할 것이니 옳은 풍속을 세우는 게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비석을 세워 후세에 귀감이 되게끔 했다. 이에 따라 평창 부사 남의로(南義老)가 글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韓鼎運)이 글씨를 써서 경춘이 투신한 낙화암에다 `순절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지금도 낙화암과 금강정 사이의 한적한 오솔길 옆에는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之處)'라고 새겨진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비석이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비문에는 “영월 기생 경춘은 이시랑이 영월에 왔을 때 처음 몸을 허락한 후 깨끗이 수절하였다. 그러나 후임 부사가 자주 불러 수청을 들라하나 이를 거절하니 볼기를 때리는 등 그 고난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몸단장을 하고 관아로 들어가서 웃는 낯으로 수일 후에 불러주면 수청을 들겠노라고 말하였다. 경춘은 그 이튿날 아침 부친 산소를 성묘하고 돌아와 동생의 머리를 빗겨준 후에 금강정 낭떠러지에 앉아 슬픈 노래를 부르니 눈물은 옷자락을 적시고 그 비통함은 참기가 어려웠다. 이 때 함께 따라온 동생을 집으로 돌려보내 놓고 분연히 벼랑에서 몸을 던져 물에 빠지니 때는 임진년(1772년) 10월이었고 그 때 나이 16세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달려와 보니 경춘의 옷 속에는 이시랑이 주고 간 편지가 있었다.

아! 경춘의 죽음이여! 이는 의로움을 좇음이 아니고 그 무엇이오. 이번에 도순찰사 손암(遜岩) 이공(李公)이 관동지방을 순시하던 길에 영월을 지나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를,

“비록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죽음으로서 지조를 지켜냈으니 이는 열녀라 할 만하며 옳은 풍속을 세우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며 자신의 녹봉을 털어 영월부사에게 비석을 세워주도록 이르니 나 또한 그 전말도 함께 적게 되었다. 생각하건대 경춘이 죽은 지 24년이 지났지만 우리 이공(李公)이 이를 처음 표창하니 경춘의 절개는 먼 훗날까지도 지워지지 않으리다”라는 글이 새겨져 그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경춘 순절비는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기생의 몸으로 영월 부사 신광수(申光洙)의 수청을 거절한 채 낙화암에 투신하여 끝까지 절개를 지킨 열녀 고경춘의 순절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그의 행적은 현대를 살고있는 여성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남원의 성춘향은 소설 속의 허구적인 인물인데 반하여 영월의 경춘은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에 우리는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영월군에서는 올해부터 열녀 경춘의 일대기를 소설과 드라마로 제작하는 작업을 시작했으며 금강정에 있는 `순절비(殉節碑)' 주변을 유적지로 조성하여 관광지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아울러 목숨을 버리면서도 끝까지 절개를 지킨 경춘의 거룩한 정신을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해서는 사당을 건립하고 경춘의 순절비 또한 강원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야 할 것이다.

엄흥용<영월향토사연구회장>

<강원일보 문화면 2003.10.1일자 기사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