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봉개동 강명봉처 고씨효열비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17-02-10 09:22
조회
5237
위치 : 제주시 봉개동 봉개초등학교 교정
유형 : 비석(효열비)
시대 : 일제강점기
비문 ; 앞 士人姜明鳳妻髙氏孝烈之閭 뒤 昔蔡人妻宋人女也旣嫁夫有惡疾父母欲改嫁之女曰夫之不幸乃妾之幸況適人之道一與之醮不可改也終養夫疾靡他晦菴夫子編入小學書中以詔萬世婦女今於濟州奉蓋里高氏卓行益見 彛性之不以古今有殊也高氏耽羅右族曾大夫諱益老大父諱受祿父諱應禮嘉善 金海金氏諱宗潁女高氏以高宗丙子六月二十一日生自幼婉娩自靜頗有令譽年十六嫁晉州姜氏爲明鳳婦三朔夫以風痺轉成臥起頂人高氏盡誠竭力百方救療
남편의 이름 앞에 붙인 士人은 학식(學識)이 있되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를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존칭의 정을 담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 해설 : 옛날 채나라 사람의 한 아내는 송나라 사람의 딸로서 시집간 후에 남편이 나쁜 병에 걸렸는데, 그이 부모가 개가시키려고 하니 딸이 말하기를 '남편의 불행은 곧 첩의 불행이며 하물며 시집간 사람의 도리로서 한 번 결혼을 하면 개가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하며 끝내 듣지 아니하고 정성껏 남편을 섬기며 병을 구환하니 회암(朱子의 아호)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만세의 부녀자로 하여금 본받도록 소학책(小學書)에 펴넣어 가르치고 있는데, 오늘날 봉개리에 사는 고씨가 있으니 그의 뛰어난 행실과 타고난 성품이 옛날 송나라 여인과 다르지 않다.
고씨는 탐라의 우족으로서 증조부의 이름은 익노(益老)요, 할아버지의 이름은 수록(受祿), 아버지의 이름은 응례(應禮)이며 가선대부라. 어머니는 김해김씨 종영(宗潁)의 따님으로 1876년 6월 21일생이며, 어려서부터 아리따우며 정조가 굳고 마음씨가 얌전하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16세에 강명봉(姜明鳳)에게 시집을 갔는데 결혼하여 겨우 3개월만에 남편이 중풍으로 전신마비가 되자 앉고 일어서는 것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정성껏 온 힘을 다하여 40년을 하루와 같이 시중들었고 백방으로 노력하여 병을 고쳤으며, 시부모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고 입에 맞는 음식과 몸에 좋다면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편히 모셔 극진히 봉양하면서 조상의 제사를 경건히 받들고 근검절약으로 재산을 일으키니 이 미담이 향청(鄕廳)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나라에 보고하니 이를 극찬하며 열녀라 하여 효열록(孝烈錄)에 올리고 크게 상을 주었다. 또한 어린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도 남다른 뜻이 있어 '동보서숙'(東普書塾)을 세워 가르치려 하나 설립 자금이 어렵다는 소문을 듣고 선뜻 금 300여원을 기부하였다.
생각하면 정열(貞烈)과 효행(孝行)은 채나라 사람의 아내와 같으나 사재를 털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채나라 사람에게서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와 다르지 않으며 더 훌륭하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이 모두 말하기를 고씨의 갸륵하고 장한 일(美擧)을 기리지 않음은 옳지 못하다 하여, 오늘과 뒷날 부녀자들로 하여금 이를 본받아 힘써 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마을 앞 거리에 효열비를 세우기로 하고, 육지에 사람을 보내어 택승(宅承)에게 비문은 부탁하였는데 택승은 본래 제주 사람으로서 끝내 사양하는 것은 옳지 못하므로 서투른 글이나마 그 공적을 대략 위와 같이 썼다.
乙亥年(1935) 음력 12월 竹山 安宅承 씀(2003년 봉개동 任洪鍾 풀어씀)
이와 관련하여 봉개초등학교의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34년 강명봉의 처 고열녀가 현금 300원을 부지 매입비로 희사하여 김대흥·김향진·임원명· 고윤문 등의 주도로 봉개동 2080번지에 개량서당인 동보서당을 설립 인가 받고 운영하였다. 이후 봉개국민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1945년 9월 9일 봉개동 1290번지에 가건물 20평과 40평 2개 동을 지어 개교하였다.
▒ 상세설명
*효열비(孝烈碑) : 효자나 열녀를 기리어 세운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