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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연사(竹淵祠)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17-01-08 09:20
조회
6333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죽연리 죽연마을  

죽연사는 1797년(정조 21) 문산 고효시(1429∼1501)와 그의 손자인 고원익(1609∼1684)를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제주고씨가 구례에 최로로 입향한 것는 고려 말엽 문상공의 조부인 고종례가 음죽현감을 재임하던 중 조선이 개국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구례 오산 아래로 이거해 오면서 부터이다.

문상공은 조부의 가르침을 받아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또한 학문을 무척 좋아하였으며, 마을에 위치한 산의 형세가 「문자(文字)」처럼 생겼다하여 산이름을 문산이라 하였고 또한 자호를 「문산(文山)」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후에 오산 아래 일실(一室)을 지어 「문산재(文山齋)」라는 편액을 걸어 놓고 학문연마와 후진 양성에 크게 공언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후손과 문인들이 공의 사우건립을 발의하여 문산사(文山祠)가 건립되었다.

▒ 연 혁 : 죽연사는 1797년(정조 21) 문산 고효시(1429∼1501)와 그의 손자인 취아 고원후(1609∼1684)를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제주고씨가 구례에 최초로 입향한 것은 고려말엽 문산공의 조부인 고종례가 음죽현감으로 재임하던 중 조선이 개국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구례 오산 아래로 이거(移居)해 오면서 부터이다.

문산공은 조부의 가르침을 받아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또한 학문을 무척 좋아하여 마을에 위치한 산의 형세가 「문자(文字)」처럼 생겼다하여 산이름을 문산이라 이름하고 또한 자호(自號)「문산(文山)」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후에 오산 아래로 일실(一室)을 지어 「문산재」라는 편액을 걸어놓고 학문연마와 후진양성에 크게 공헌하였다(「문산재기(文山齋記)」『문산집(文山集)』).

공이 세상을 떠나자 후손과 문인들이 공의 사우건립을 발의하여 문산사가 건립되었다. 이후 1802년(순조 2) 구례현감을 역임하고 구례향교 중건과 향촌교화에 공이 많은 사재당 안처순(1492∼?)이 추배되었으며, 이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811년(순조 11)에는 효행으로 널리 알려진 송암 정태서(1609∼1685)가 다시 추배됨으로써 현재 4위(位)를 배향하고 있다.

1868년(고종 5)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사우가 훼철되었다. 서원훼철시 문산 고효시와 취아 고원후의 위패가 사우 뒷편에 이안되고 (오산아래 문산 고효시·취아 고원후의 단(壇)이 있다), 사재당 안처순의 위패는 후손들이 남원 녕천서원으로 이안하였으며, 송암 정태서의 위패는 봉서리 동산마을로 각기 이안되었다.

그후 1955년 문산공의 후손인 고익효·고익태가 발의하고 유림이 합모하여 죽연사는 중건될 수 있었다. 현재 죽연사는 사우인 문산사, 신문, 동·서재, 외삼문, 강당인 백원당, 고직사, 전사청 등이 있다.

한편 죽연사의 경제력은 사우창건(1797년) 당시에 전답(田畓) 63두락(서원답 50두락, 고직답 3두락, 사우직답 2두락, 오장답 3두락, 반채답 2두락, 소목전 3두락)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서원답 4두락·문사재답 3두락·문산재전 8두락·임야 16정보·죽림 1,000평 만이 남아있다.

고효시(1429∼1501)의 자는 사우, 호는 문산, 고을나의 후손이며 현감 고종례의 4세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목욕재계하고 오산신(마을산신)에게 지성으로 축원하여 부모의 병을 완치시켰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은 공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부모를 소생시켰다고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또한 공은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한문을 무척 좋아하여 마을에 위치한 산의 형국이 「문자」형국처럼 생겼다하여 산 이름을 「문산」이라 부르고, 산아래 일실(一室)을 지어 문산재라 이름하여 학문연마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이때부터 자호(自號)를 문산이라 칭하였다.

공은 성장하여서도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3년 여막살이를 하는 동안 매일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니 순천수령 박응수가 공의 여막 옆을 지나다가 공의 효성에 탄복하여 공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읊어 주었으며, 인근 마을주민들도 공을 "혈효자"라 불렀다고 한다. 공의 유집(遺集)으로 1900년에 간행한 『문산집』1책이 있다.

안처순(1492∼?)의 자는 순지, 호는 기재 또는 사재당, 순흥인으로 을항명현이다. 회헌 문성공 안유의 후예이며 6세에 고아가 되어 중부(仲父)인 판서공 안침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정암 조광조의 문하(門下)에서 종유하였고, 1513년(중종 8) 진사(進士), 1514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예문관검열에 제수되고 이어 홍문관정자에 승진되었다. 1518(중종 13) 구례현감에 제수되어 구례향교 중건과 향촌민 교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1533년 성균관(成均館)에 입사하여 1534년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

고원(1609∼1685)의 자(字)는 태화, 호는 취아, 문산공의 현손이다. 5세의 어린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고 하나를 배우면 잊지 않았다고 한다. 8세때 인근에 거주하던 장희재가 사마에 합격하는 것을 보고 더욱 학문에 전념하여 원근에서 공의 재주를 듣고 모여 들었다고 한다.

공은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14세때 모친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되자 밤낮으로 기도하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간호하였으나 완쾌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침식을 끊고 슬퍼하니 인근 주민들은 공을 효자라 칭찬하였다.

한편 공은 1662년(현종 3) 증광진사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현(縣)의 남쪽 운곡 문강에 침류정이라는 정자를 건립하여 학문연마와 후진양성에 공헌하였다. 또한 고흥향교 중건에도 참여하여 양사재를 건립하는데 주력하였다.

공의 저서로는 1903년에 간행된 『취아실기(醉啞實記)』2권이 있다. 이 유고(遺稿)에는 공이 저술하여 가훈으로 삼고 있는 「가경(家警)」이 수록되어 있고, 공이 구례에서 은거생활을 하며 학문연마와 후진양성을 하였던 침류정에 관한 기사가 서술되어 있으나 현재 침류정은 현존하지 않는다.

정태서(1639∼1714)의 자(字)는 시창(始唱), 호(號)는 송암, 판윤 정강의 후손이며 정○의 3세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맛있는 음식은 부모에게 먼저 공양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부친상을 당하여 3년동안 여막살이를 하며 슬피 통곡하니 인근 주민들이 크게 감동하였다. 또한 모친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되자 정성으로 간호하였고, 겨울에는 물고기를 잡아 봉양하였으며 모친이 돌아 가신 후에는 매일 30리를 걸어다니면서 3년상을 지냈다.

▒ 유적현황 : 현재 사당인 죽연사는 정면 3칸 특면 1칸의 맞배지붕이고, 강당인 백원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이외 내·외삼문이 갖추어져 있다.

▒ 관련자료 : 죽연사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오산아래 ①<문산고선생지단>과 <취아고선생지단>이 있다. 이 단은 1868년 서원훼철령으로 인하여 사우가 훼철되었을 때 문산 고효자와 취아 고원후의 위패를 매안(埋安)하고 건립한 것이다. 단의 규모는 높이 115cm, 넓이 37.5cm, 두께 8.5cm이다. 이외에 죽연사와 관련된 자료로서 현전하는 것은 없으며, 다만 행방후에 건립된 강당(講堂)인 백원당의 내부에 죽연사의 연혁을 알 수 있는 ②<죽연사기(竹淵祠記)>(1961년, 조민식 서)가 있다. ③제보자 : 고상선(82세, 문척면 죽마리 죽연마을), 관리자 : 고상래(71세, 문척면 죽마리 죽연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