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녹리문집 (甪里文集)
설명 : 조선 말기의 학자 고성겸선생의 시문집.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조선 말기의 학자 고성겸(髙聖謙)선생의 시문집. 14권 7책. 목활자본. 1895년 아우인 문겸(文謙)·숙겸(淑謙)과 이만인(李晩寅) 등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권말에 문겸의 발문이 있다.
다른 문집과는 달리 보기 드문 악부체(樂府體) 시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으며, 한성(漢城)의 문물·인물 등을 운율과 고조(古調)를 사용하여 읊은 〈한성악부 漢城樂府〉 28장을 비롯해 〈악부사〉 등은 중국 장형(張衡)의 〈양경부 兩京賦〉와 백거이(白居易)의 〈악부 樂府〉에 짝이 되는, 우리 나라의 문학사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선생은 경사(經史)에서도 독특한 성격을 보여준다. 〈항우본기론 項羽本記論〉에서는 ≪사기 史記≫와 ≪한서 漢書≫에 둘 다 항우의 실기를 수록하고 있으나, ≪사기≫에는 본기(本記)에 여러 제왕과 나란히 싣고, ≪한서≫에는 열전(列傳)에 실은 점, 또 본기에 수록하되 제호(帝號)는 붙이지 않고 그냥 〈항우본기〉로만 적은 점, 또 ≪한서≫에는 〈항적전 項籍傳〉으로 내리깎아 진승(陳勝)과 같은 반열에 둔 점 등을 비교해, ≪사기≫와 ≪한서≫ 중 어느 쪽의 사필이 춘추대의를 따랐는지를 요연하게 분석, 전대의 사법(史法)에 예리한 논단을 가하였다.
소 가운데 1855년 5월에 당시 영남유생들에 의해 끊임없이 주창되어오던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추존을 청한 〈청경모궁전례소 請景慕宮典禮疏〉는 이 무렵 조정의 형세가 당색을 달리해 어떻게 대치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는 것이다.
〈청서원복설소 請書院復設疏〉는 고종 초 서원철폐령이 내려진 지 10여년 뒤 서원의 복설을 청한 상소문으로, 이때 서원철폐가 유림간에는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등에 대한 당시의 사정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글이다.
〈척화소 斥和疏〉는 일왕(日王)의 국서(國書)를 받아들여 조약을 맺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한 상소문으로, 영남 일대 유생들의 배일운동에 대한 면모를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 밖에 지(識) 8편은 상주 산양현(山陽縣) 근품산(近品山) 주위의 경개와 더불어 옛 사벌(沙伐) 때의 성황단(城隍壇) 터와 죽림사구지(竹林寺舊址)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 등 그 유래가 자세하지 않은 유적과 유물의 내력에 대하여 8편으로 나누어 하나씩 밝힌 것으로, 이는 향토사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들이다.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 상세설명
*고성겸(髙聖謙)
1810(순조 10)∼1886(고종 23).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치희(穉希), 호는 녹리.
아버지는 몽찬(夢贊)이며, 어머니는 청주정씨(淸州鄭氏)로 내성(來成)의 딸이다.
1844년(헌종 10)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영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정필규(鄭必奎)의 수제자였던
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사서오경은 물론, 음양 성력(星曆) 하락(河洛) 율려(律呂) 등에까지 통달하였다.
1850년(철종 1) 청량정사강회(淸凉精舍講會)에 나가 재사의 이름을 얻었다.
1855년 이휘병(李彙炳)과 함께 상경하여 장헌세자(莊憲世子)의 추존을 청하는 소를 올렸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조신(朝臣)들이 국문(鞫問)할 것을 주장하자 수천의 소유(疏儒)들이 사태가 위급함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혼자 굳건한 기상을 보여 세인의 기림을 받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나라의 정세가 날로 기울어져가자, 향리인 상주에 은거한채 선대의 유집 등을 간행하면서 지냈다. 경사(經史)에 두루 해박하였지만, 특히 악부체 시가에 능하여〈한성악부 漢城樂府〉28장을 비롯하여 그가 남긴 수많은 악부사(樂府詞)는 모두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저서로 《녹리문집》 14권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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