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협(髙協) 고려말 문신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10:54
조회
406
중시조(中始祖) 성주공(星主公) 말로(末老)의 13세손이고 장흥백(長興伯) 중연(仲연)의 증손이며 지영주사(知寧州事) 백안(伯顔)의 장남이다.
고려조 익원대군 왕소(王玿)의 사위로 병부시랑, 북부상서를 지냈다. 공(公)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으나 동년구교(同年舊交)인 태종(太宗)이 『신하겸 스승으로 나를 도와 달라』하며 공(公)의 이름을 신부(臣傅)라 고쳐부르고 가깝게 대하였다.
1409(태종9) 5월 태종이 태평관(泰平館)에서 연회를 마치고 말을 타고 환궁할 때 낙마할뻔 하자 어마(御馬) 훈련이 잘 되지 못하였다 하여 판사복시사(判司僕侍事)인 공(公)과 사복정(司僕正) 문천봉(文天奉), 환자(宦者) 한문직(韓文直)을 순금사(巡禁司)에 하옥시켰다.그러나 이듬해 9월, 그 사건은 말이 다리를 절었다는 사유로 죄가 없음이 밝혀져 공(公)은 석방되었다.
태종(太宗)은 공(公)에게 호조참의(戶曹參議), 대호군(大護軍)의 높은 벼슬을 주어 몇차례 불렀으나 공(公)『외가(外家)인 전조(前朝:高麗)의 의리를 잊을 수 없다』하고 높은 벼슬도 사양하고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후 공(公)이 별세하자 태종은 특별히 장성군 삼계면 덕산리(長城郡 森溪面 德山里) 양수암 진좌(兩峀岩 辰坐)에 예장케 하고 삼계면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하였다.
1892(고종29) 후손들이 덕산리 귀바우에 천산제(天山薺)를 세워 공(公)을 모시고 있으며 1975년 도산사(道山祠)에 배향(配享)하였다.
▒덧붙이는글
*중연(仲연)선조님의 휘자(諱字)중 연자는 나무목(木)+대자리연(筵) 이나 아래한글에서는 나오지 않아 한글로 대체함
*휘자(諱字) : 돌아가신 높은 어른의 생전의 이름자.
▒상세설명
*신부(臣傅) : 신하 겸 스승이라는 뜻
*사패지(賜牌地) : 나라의 임금이 내려 준 땅
*배향(配享) : 공로(功勞)가 있는 신하(臣下)의 위패(位牌)를 종묘(宗廟)에 모심. 학덕(學德)이 있는 사람의 위패(位牌)를 문묘(文廟)나 사당(祠堂), 서원(書院) 등(等)에 모심
고려조 익원대군 왕소(王玿)의 사위로 병부시랑, 북부상서를 지냈다. 공(公)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으나 동년구교(同年舊交)인 태종(太宗)이 『신하겸 스승으로 나를 도와 달라』하며 공(公)의 이름을 신부(臣傅)라 고쳐부르고 가깝게 대하였다.
1409(태종9) 5월 태종이 태평관(泰平館)에서 연회를 마치고 말을 타고 환궁할 때 낙마할뻔 하자 어마(御馬) 훈련이 잘 되지 못하였다 하여 판사복시사(判司僕侍事)인 공(公)과 사복정(司僕正) 문천봉(文天奉), 환자(宦者) 한문직(韓文直)을 순금사(巡禁司)에 하옥시켰다.그러나 이듬해 9월, 그 사건은 말이 다리를 절었다는 사유로 죄가 없음이 밝혀져 공(公)은 석방되었다.
태종(太宗)은 공(公)에게 호조참의(戶曹參議), 대호군(大護軍)의 높은 벼슬을 주어 몇차례 불렀으나 공(公)『외가(外家)인 전조(前朝:高麗)의 의리를 잊을 수 없다』하고 높은 벼슬도 사양하고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후 공(公)이 별세하자 태종은 특별히 장성군 삼계면 덕산리(長城郡 森溪面 德山里) 양수암 진좌(兩峀岩 辰坐)에 예장케 하고 삼계면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하였다.
1892(고종29) 후손들이 덕산리 귀바우에 천산제(天山薺)를 세워 공(公)을 모시고 있으며 1975년 도산사(道山祠)에 배향(配享)하였다.
▒덧붙이는글
*중연(仲연)선조님의 휘자(諱字)중 연자는 나무목(木)+대자리연(筵) 이나 아래한글에서는 나오지 않아 한글로 대체함
*휘자(諱字) : 돌아가신 높은 어른의 생전의 이름자.
▒상세설명
*신부(臣傅) : 신하 겸 스승이라는 뜻
*사패지(賜牌地) : 나라의 임금이 내려 준 땅
*배향(配享) : 공로(功勞)가 있는 신하(臣下)의 위패(位牌)를 종묘(宗廟)에 모심. 학덕(學德)이 있는 사람의 위패(位牌)를 문묘(文廟)나 사당(祠堂), 서원(書院) 등(等)에 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