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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길훈(髙吉勳) 해병 소장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11:46
조회
279

● 한        문 : 髙吉勳
● 생몰연대 : 1922.7.10-1981.2.14
● 출신지역 : 함남 영흥
● 최종계급 : 해병 소장
● 상훈내용 : 을지무공훈장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 제3집, 해병전투사

1. 생애(1922∼1981)

1922년 7월 10일 함경남도 영흥군 영흥읍 남산리 115번지에서 출생한 고길훈(髙吉勳) 해병 소장은 경복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9월 메이지(明治)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조국의 광복과 함께 귀국한 그는 1946년 5월 11일 해군에 입대하여 동년 10월 28일 특임으로 해군 소위(군번 80078)로 임관하였다.

임관 이후 6·25전쟁 발발 전까지 해병대 창설요원으로 활약했으며, 진주와 제주도 등에서 토벌작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6·25전쟁 개전 초기에 북한군이 서해안을 우회하여 호남지역까지 남하하자, 그는 고길훈부대의 부대장으로서 1950년 7월 16일 군산에 상륙하여 해병대 최초의 전투인 장항·군산·이리지구 전투에 참가,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북한군의 금강진출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지연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950년 9월 해병 제1연대 1대대장인 그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한국군 최초의 선봉부대로 행주에서 한강을 도하했으며, 강력히 저항하는 북한군을 섬멸하고 수도서울탈환작전의 성공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는 이어 1951년 8월 해병 제1연대 부연대장, 1951년 12월 포병대대장, 1952년 5월 도서부대장 등을 차례로 거치면서 동해안 전략도서작전, 김일성고지전투, 월산령지구전투 등에 참전해 수많은 전공을 세운 후 해병 제1전투단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1955년 4월 해병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1959년 1월 5일부터 1960년 6월 23일까지 제1임시여단장을 역임하고 1961년 11월 해병 제1사단장으로 전보되어 해병발전에 전력을 다한 그는 1963년 12월 5일 해병 소장으로 예편하였고, 1981년 2월 14일 6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전북 군산시 월명공원에는 고길훈부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 건립된 '해병대 장항·군산·이리지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전쟁기념관에서는 2003년 2월 ' 이 달의 호국인물'로 선정하여 현양행사를 거행하였다.

2. 공적

고길훈(髙吉勳) 해병 소장은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당시 제1중대장으로 창설에 기여하였고, 이어 진주, 제주 등지에서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거두었다. 또한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 제6사단 13연대가 서해안을 우회하여 호남지역으로 남하할 때 제주기지를 출발한 '고길훈부대'는 1950년 7월 16일부터 7월 20일까지 군산, 장항, 이리지구에서 최초로 전투에 참가하여 적의 금강선 진출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1950년 6월 25일 38도선을 넘어 침공한 북한군은 서울과 수원 등지를 경유하여 금강으로 쇄도하였다. 당시 제주도에서 훈련과 공비토벌에 전력하던 해병대는 처음으로 전선에 출동하게 되어 7월 13일 고길훈 소령 지휘하에 약 1개 대대가 제주도를 출항하였다. 08시 30분 제주도를 출항한 해병대는 15일 08시에 군산에 입항하여 해양대학교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천안을 점령한 북한군은 일부 병력을 서해안으로 우회시켰다. 이 적은 대대정도의 병력을 가진 부대로써 국군과 아무런 접전도 없이 대천(大川)을 경유한 후 군산을 지향하여 7월 17일 09시경에는 장항 북방 7㎞지점까지 침투하였다. 이에 해병대는 이 적을 공격하고자 제3중대를 예비대로 하고 김광식(金光植) 중위의 제1중대와 이봉출(李鳳出) 중위의 제2중대를 공격부대로 하여 17일 12시 30분 장밯 북방 4㎞지점인 50고지 및 42고지까지 진출하여 적에 대비하였다. 적은 해병대가 빠르게 그곳까지 진출해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하고 유유히 남하하여 왔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해병대는 적이 사정권에 이르자 맹렬한 집중사격을 퍼부어 적을 교란시켰다. 기습에 당황한 적은 후퇴할 기세를 보일 정도로 피해는 막심하였다.

당시 해병대가 소지한 무기는 대부분이 일제 99식 소총이었고, 지원화기로는 경기관총 3정, 중기관총 2정, 60㎜박격포 3문뿐이어서 그 장비란 적의 우세한 신장비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탄환 역시 부족하였으며, 현대전에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유치한 병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처녀작전인 이 전투의 성과는 해병대 창설이래 피와 땀으로 이룬 맹훈련의 결과였다.

일시 후퇴했던 적은 부대를 재정돈하고 반격을 가해왔다. 해병대는 7시간 여에 걸쳐 악전고투하였으나 적의 빗발치는 탄환에 맨손으로 대하는 것과 같은 무모한 작전은 할 수 없어 부득이 철수를 단행하였다. 제3중대의 지원을 받으며 철수를 완료한 제1중대 및 제2중대는 대대본부와 함께 군산까지 철수하였다.

장항을 점령한 적은 군산에 대해 맹렬한 포격을 가해왔다. 7월 18일 01시 해병대는 출동한 총 병력을 동원해 금강 남단방어에 임하고 있었으나, 이날 07시경 적은 이미 야포대대를 포함한 1개 연대병력으로서 신성리(新成里)에서 금강을 도하하여 성영리(成榮里)로 침입하고 있었다. 해병대가 군산에 도착한 것은 장항을 점령한 적의 진출을 금강에서 저지할 계획으로 단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은 이미 금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으므로 해병대는 제3중대를 이리로 전진시키고, 제2중대는 군산-이리간 철도 연선(沿線)을 따라 개정리(開井里)와 지경리(地境里) 일대를 수색하고 부근 일대에 포진하였다. 금강을 도하한 적은 일부병력만이 이리로 향하고 주력은 군산 동북방 10㎞ 지점까지 진출하여 군산을 남동북으로 포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적정을 판단한 고길훈 부대장은 7월 19일 05시, (1) 부대는 재정비하기 위해 군산을 철수하려 함, (2) 김병호(金秉鎬) 대위는 이리 방면으로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제3중대를 지휘하여 이리로 향하라, (3) 제1중대는 고사리(姑舍里) 고지에 위치하여 부대본부 및 제2중대의 철수를 지원하라, (4) 김종식(金鍾植) 중위는 전투정보대를 지휘하여 군산에 잔류하여 정찰에 임하며 적의 진출을 지연케 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리하여 7월 20일 부대는 군산비행장에 집결하였고, 제1중대는 1개 경기소대를 고사리부근 고지에 배치하여 부대철수를 위한 지원사격에 임하게 하고 수색대만은 시내에서 적과 교전함으로써 적의 진출을 지연케 하였다. 수색대는 이때 적병 6명을 사살하고 11명을 부상시켰으며, 1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작전에서 해병대도 2명의 전사자와 4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군산을 포위한 적은 점차 군산시내로 침입해 옴으로써 수색대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종식 중위는 끝까지 시내에 잔류하여 옥쇄하는 한이 있더라도 적의 침입을 최대한 지연할 각오였으나 주위의 형세는 대단히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적은 이미 경찰서를 점령하고 물밀 듯이 시내로 침입함에 따라 눈물을 머금고 철수하여 본부와 합류하고 7월 21일 목포에 도착하였다.

한편 적은 7월 20일 함열을 점령하고 이리를 향해 남하하고 있었으나 이리로 전진한 김병호 대위가 지휘하는 제3중대는 이리 북방 1㎞지점에서 유격 교전하여 약 16명을 사살하고 50명을 부상시켰다. 이 전투에서 해병대는 15명의 전사자와 17명의 부상자 그리고 7명의 행방불명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

이같이 제3중대는 적의 신장비에 비할 수 없는 구식장비로써 강력한 적과 조우하여 용감히 싸우면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철수명령에 의거 목포로 향하는 철로를 따라 질서있게 철수를 개시해 7월 21일 철수를 완료하고 집결지인 목포에 도착하였다.

이후, 고길훈 해병 소장은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한 후 해병 제1대대장으로서 서울탈환작전에 나섰다. 북한군은 서울사수의 최후방어선인 104고지 일대를 완전 요새화하여 강력히 방어에 임하였다. 이때 해병 제1대대를 지휘한 그는 1950년 9월 21일 공격을 감행하여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적을 격멸하고 중앙청까지 진격함으로써 수도탈환의 발판을 제공하였다.

1950년 8월로 접어들자 국군과 유엔군은 마산-왜관-포항에 이르는 낙동강전선에 철통같은 방어선을 구축하고 지연작전에 종지부를 찍고 반격태세를 갖추었다. 적은 전 병력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였기 때문에 후방에 충분한 예비대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아군의 작전상 중대한 암시를 주는 것이 되었다. 더욱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언제, 어디서라도 적 후방에 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유엔군사령부에서 세운 인천상륙작전계획은 유엔군이 참전한 지 불과 5일 후에 이미 수립 착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인천은 수도서울의 관문이므로 인천상륙작전은 서울을 최단 시일 내로 탈환할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이 되었고, 또한 남한 깊숙이 투입된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의미에서도 큰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이리하여 인천상륙작전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마침내 감행되었다.

작전을 담당한 부대는 미 해병 제1사단과 국군 해병대였다. 당시 우리 해병대는 신현준 사령관이 제주도사령부에서 신병 3,000명을 모집하여 1개 연대를 편성하고, 9월 6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미 해병 제5연대와 합동하여 훈련을 마친 후 상륙작전에 참가하였다.

한편 당시 통영지구에서 전투 중에 있던 '김성은부대'에서 김광식 대위가 인솔한 제2중대와 이봉출 대위가 인솔한 제3중대가 인천상륙부대에 편입되었다. 9월 11일 아 해병대는 상륙에 필요한 준비를 완료하고 제2대대의 일부는 미 함정 LST Q3에 승선하고 잔여부대인 제1대대 및 제3대대는 12일 12시 '피카웨이'호에 승선하였다. 이 '피카웨이'호에는 미 대통령 특사 로우 소장과 해군 총참모장 손원일 제독,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 대령이 탑승하고 있었다. 아 해병대는 이 함상에서 상륙작전을 위한 진지한 토의를 진행하였다.

수송선단 출발에 앞서 아 해군함정 702함을 기함으로 한 703함, 502함, 501함, 503함, 512함, 513함, 510함, 519함의 9척은 9월 13일 18시에 덕적도에 집결하였고, 이에 앞서 701함을 기함으로 한 704함, 306함, 302함, 307함, 306함의 6척은 9월 13일 12시에 청도(靑島)에 집결하여 적 함정의 잠입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9월 13일 대수송선단에 앞선 미 함정 미조리호와 순양함 6척, 구축함 6척 및 항공모함을 포함한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 등 6개국 함정 261척이 영종도 근방에 집결하여 인천연안의 군사시설에 대해 포격을 시작하였다. 9월 13일과 14일 양일간에 항공모함과 함재기 200대의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인천은 화염으로 휩싸였으며, 특히 월미도에 대한 포격은 극심하여 순식간에 섬이 그 형태마저 바뀌었다.

9월 15일 05시부터 수송선단은 구축함의 엄호를 받으면서 북상을 계속하여 07시에는 인천 본수도(本水道)에 도착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불타오르는 인천에 최후의 포격을 가하였고, 이 틈을 타서 수송선단은 월미도 주위에 접근하였다. 미 제5연대 3대대와 제11포병중대는 즉시 월미도로 돌격하여 28분 만에 점령하였다.

상륙작전을 수행함에 앞서 미 제5연대는 '레드비치(Red Beach)'를, 미 해병 제1연대는 '불루비치(Blue Beach)'를 공격해안으로 정하고 아 해병연대 제3대대는 미 해병 제5연대에 배속되어 15시에 상륙모정에 탑승하고 18시부터 미 제5연대에 뒤이어 '레드비치'로 상륙하였고, '피카웨이'호 선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해병대 주력은 예정대로 9월 15일 18시를 기하여 역시 '레드비치'에 상륙하였다.

상륙부대는 먼저 몇 십개의 조로 편성되어 각 조별로 상륙용 함선에 탑승하여 파상공격을 감행하였다. 먼저 제1대대가 상륙하여 즉시 인천제분소 남방의 작은 고지로 지향하였고, 제3대대 역시 동 지구로 상륙하였으며, 제2대대는 사령부가 상륙한 후 그 뒤를 따랐다. 9월 15일 11시 30분 해병연대 주력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을 완료하였으며, 상륙부대는 당일 해안선 일대에서 야영하게 되었다.

아군이 상륙하기 전에 인천을 경비하던 적은 약 9,000명이었고, 이밖에 이동병력으로서 김포, 의정부 방면에서 상당한 병력이 집결되었으나 해병대가 상륙할 무렵에는 대부분 인천에서 부평, 김포 방면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이에 인천시가에서 잔적을 소탕하면서 부평으로 진격하였다.

북한군은 서울 방어의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해 부평지구에 1개 대대 이상의 병력을 잠복시켜 유엔군의 진격을 저지하려했으나, 이를 격퇴, 섬멸하면서 9월 20일 제1대대는 정곡리에 진출하였고, 제2대대는 미 해병 제5연대와 합동으로 행주로 향해 한강을 도하할 준비를 갖추었고, 제3대대는 김포에서 패주, 도하하지 못한 패반병과 조우하여 격렬한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한강도하 태세를 취하면서 한강대안에 접근한 제2대대는 9월 21일 06시를 기하여 수륙양용차를 선두로 도하를 감행하여 행주대안에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제1대대도 08시에 행주로 도하하여 최일선을 담당하고 서울로 진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