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성씨] 성씨에 얽힌 숨겨진 사연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19-11-20 13:39
조회
43414
“김해 김씨·김해 허씨·인천 이씨 한핏줄” 결혼 안해
“잉어가 거란과 싸우던 윤관 도와”파평 윤씨 잉어 안먹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족보가 가장 발僿?나라답게 여러 성씨들과 관련된 사연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는 현재진행형인 과거사도 적지 않다.
●원래 김씨였던 안동 권씨
안동 권씨의 시조 권행(權幸)은 원래 신라 왕실의 후손인 경주 김씨였다. 후백제의 견훤(진훤)이 927년 경주에 침입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자 안동에 살던 김행은 복수를 결심한다. 3년 후에 후백제군과 왕건의 고려군이 안동 지역에서 대치하자 김행은 성주(城主) 김선평(金宣平:신 안동 김씨 시조)과 이 지역의 호족 장정필(張貞弼:안동 장씨 시조)과 함께 군사를 모아 고창군 병산(지금의 안동군 와룡면)에서 견훤의 8000 대군을 함몰시키는 큰 공을 세운다. 이 전투로 후삼국의 주도권을 쥐게 된 왕건은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키고 김행에게 ‘정세를 잘 판단해 권도를 잘 취했다(能炳機達權)’라고 칭찬하면서 권씨 성을 내린 것이 안동 권씨의 시작이다.
고려는 성종 2년(983) 권행, 김선평, 장정필 등 세 명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안동시 북문동에 삼태사묘를 세웠다. 천여 년이 지난 현재도 안동 권씨와 신 안동 김씨, 안동 장씨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파평 윤씨 시조 겨드랑이에 잉어 비늘
파평 윤씨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운 윤신달(尹莘達)을 시조로 삼는데 잉어를 먹지 않는다. 여기에는 시조 윤신달과 그 5대손 윤관이 관련되어 있다. 경기도 파평(파주)에 살던 윤온 할머니는 파평산 기슭의 용연(龍淵)이란 연못에서 금궤를 주워 열어보니 한 아이가 누워 있었다. 그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이 아이가 훗날 윤온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신달이 된다.
파평 윤씨의 또 하나의 잉어 전설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전설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거란과 싸우던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쫓겨 강가에 이르자 잉어들이 다리를 만들어주어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물론 거란군이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들은 흩어진다.
윤관이 영평(파평)백에 봉해짐으로써 파평을 본관으로 삼은 윤씨들은 잉어의 자손이자 윤관에게 도움을 준 데 대한 보답의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라를 먹지 않는 경주 이씨
자라를 먹지 않는 성씨도 있다.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로 사형 당한 이원의 모친은 사육신 박팽년의 딸이었다. 그의 부친 이공린(李公麟)이 혼례날 밤 꿈에 늙은 첨지 여덟 명이 절하면서 “우리들이 장차 솥에 삶겨서 죽게 되었는데, 만약 죽을 생명을 살려 주시면 후하게 은혜를 갚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놀라서 깨어보니 자라 여덟 마리를 막 국에 넣으려고 하므로 즉시 강물에 놓아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때 한 마리가 달아나자 어린 종이 삽으로 잡으려다가 잘못해 자라목을 끊어 죽이고 말았다. 그날 밤에 첨지 일곱 명이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꿈을 꾸었다.
결혼 후 이공린은 여덟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오(鼇:자라)·귀(龜:자라)·원(자라)·타(:자라)·별(鼈:자라)·벽(:자라)·경(鯨:고래)·곤(鯤:곤이)으로 지었다. 꿈의 상서로움을 기념해 자라나 물고기와 관련이 있는 맹(:맹꽁이)·귀(龜:거북)·어(魚:물고기)를 부수로 사용한 것이다.
사화로 희생된 이원이 어린 종에게 죽은 자라라고 해석되면서 꿈의 징험은 더욱 뚜렷해진 셈이 되었는데,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문에서 부계기문을 인용해 ‘지금도 이씨(경주)들은 자라를 먹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통혼 않는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인주) 이씨
김해 김씨의 시조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인데, 그 왕비는 멀리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황옥(許黃玉)이었다. 그런데 김해 김씨는 김해 허씨, 인천(인주) 이씨와 통혼하지 않는다. 장자 거등왕(居登王)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김해 김씨가 되었지만 김해 허씨 등은 어머니 허황후의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적인 ‘금관고사급허성제문집(金官古事及許性齊文集)’은 허황후는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 거등은 태자에 봉해졌고 차자는 어머니의 성을 좇아 허씨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형제간이기 때문에 통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씨가 포함된 데는 신라 경덕왕 14년(755)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알려지고 있는 허기(許寄)와 관련이 있는데, 그는 안록산의 난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고 당나라 현종을 따라 촉나라(蜀國)로 피란했다. 난이 평정된 후 현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종성(宗姓)인 이씨 성을 하사했는데 이후 허씨는 이씨와 복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인천 이씨는 양천 허씨에서 갈라진 태인 허씨에서 다시 갈라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원래 김해 허씨로, 왕건이 견훤과 싸울 때 군량을 공급한 공으로 공암(양천)을 식읍으로 받았는데 여기에서 허사문(許士文)을 시조로 하는 태인 허씨가 갈라져 나왔고, 태인 허씨에서 다시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는 인천 이씨가 갈라져 나왔다.
이처럼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은 모두 같은 시조에서 갈라진 한핏줄이며, 그래서 이들은 서로 다른 성씨에도 불구하고 가락중앙종친회에 함께 소속되어 있다.
●결혼 금하는 청송 심씨와 나주 박씨
반면 서로에 대한 원한 때문에 혼인을 거부하던 성씨들도 있었는데 청송 심씨와 나주 박씨가 한때 그랬다.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의 부친 심온(沈溫)은 세종의 즉위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세종 즉위년(1418)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갔다가 그를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었던 것이 상왕 태종의 심기를 건드려 화를 당한다.
태종은 심온의 동생 심정이 총제(摠制)로 있으면서 ‘금위(禁衛) 군사로 상왕(태종)과 주상(세종) 두 분을 호위하려니 숫자가 적다’며 불평한 것을 역모로 몰아 고문 끝에 심온을 끌어들인다. 귀국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사형 당한 심온은 이를 좌상 박은(朴誾)의 무고 탓으로 돌려 ‘이후로는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두 집안이 혼인하는 예가 드물었는데, 사실상 심온을 죽인 인물은 박은이 아니라 태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당파 따라 옷고름 달리 매기도
조선 후기에는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로 다른 당파끼리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당파에 따라 옷고름 매는 방법까지 달라 멀리서 봐도 서로 무슨 당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니 그 정도의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조상을 섬기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과거의 원한이나 당쟁 시절의 잘못된 유산까지 계승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매일처럼 신문지상에 넘쳐나는 현대판 당쟁들을 볼 때마다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잉어가 거란과 싸우던 윤관 도와”파평 윤씨 잉어 안먹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족보가 가장 발僿?나라답게 여러 성씨들과 관련된 사연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는 현재진행형인 과거사도 적지 않다.
●원래 김씨였던 안동 권씨
안동 권씨의 시조 권행(權幸)은 원래 신라 왕실의 후손인 경주 김씨였다. 후백제의 견훤(진훤)이 927년 경주에 침입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자 안동에 살던 김행은 복수를 결심한다. 3년 후에 후백제군과 왕건의 고려군이 안동 지역에서 대치하자 김행은 성주(城主) 김선평(金宣平:신 안동 김씨 시조)과 이 지역의 호족 장정필(張貞弼:안동 장씨 시조)과 함께 군사를 모아 고창군 병산(지금의 안동군 와룡면)에서 견훤의 8000 대군을 함몰시키는 큰 공을 세운다. 이 전투로 후삼국의 주도권을 쥐게 된 왕건은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키고 김행에게 ‘정세를 잘 판단해 권도를 잘 취했다(能炳機達權)’라고 칭찬하면서 권씨 성을 내린 것이 안동 권씨의 시작이다.
고려는 성종 2년(983) 권행, 김선평, 장정필 등 세 명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안동시 북문동에 삼태사묘를 세웠다. 천여 년이 지난 현재도 안동 권씨와 신 안동 김씨, 안동 장씨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파평 윤씨 시조 겨드랑이에 잉어 비늘
파평 윤씨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운 윤신달(尹莘達)을 시조로 삼는데 잉어를 먹지 않는다. 여기에는 시조 윤신달과 그 5대손 윤관이 관련되어 있다. 경기도 파평(파주)에 살던 윤온 할머니는 파평산 기슭의 용연(龍淵)이란 연못에서 금궤를 주워 열어보니 한 아이가 누워 있었다. 그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이 아이가 훗날 윤온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신달이 된다.
파평 윤씨의 또 하나의 잉어 전설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전설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거란과 싸우던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쫓겨 강가에 이르자 잉어들이 다리를 만들어주어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물론 거란군이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들은 흩어진다.
윤관이 영평(파평)백에 봉해짐으로써 파평을 본관으로 삼은 윤씨들은 잉어의 자손이자 윤관에게 도움을 준 데 대한 보답의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라를 먹지 않는 경주 이씨
자라를 먹지 않는 성씨도 있다.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로 사형 당한 이원의 모친은 사육신 박팽년의 딸이었다. 그의 부친 이공린(李公麟)이 혼례날 밤 꿈에 늙은 첨지 여덟 명이 절하면서 “우리들이 장차 솥에 삶겨서 죽게 되었는데, 만약 죽을 생명을 살려 주시면 후하게 은혜를 갚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놀라서 깨어보니 자라 여덟 마리를 막 국에 넣으려고 하므로 즉시 강물에 놓아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때 한 마리가 달아나자 어린 종이 삽으로 잡으려다가 잘못해 자라목을 끊어 죽이고 말았다. 그날 밤에 첨지 일곱 명이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꿈을 꾸었다.
결혼 후 이공린은 여덟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오(鼇:자라)·귀(龜:자라)·원(자라)·타(:자라)·별(鼈:자라)·벽(:자라)·경(鯨:고래)·곤(鯤:곤이)으로 지었다. 꿈의 상서로움을 기념해 자라나 물고기와 관련이 있는 맹(:맹꽁이)·귀(龜:거북)·어(魚:물고기)를 부수로 사용한 것이다.
사화로 희생된 이원이 어린 종에게 죽은 자라라고 해석되면서 꿈의 징험은 더욱 뚜렷해진 셈이 되었는데,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문에서 부계기문을 인용해 ‘지금도 이씨(경주)들은 자라를 먹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통혼 않는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인주) 이씨
김해 김씨의 시조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인데, 그 왕비는 멀리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황옥(許黃玉)이었다. 그런데 김해 김씨는 김해 허씨, 인천(인주) 이씨와 통혼하지 않는다. 장자 거등왕(居登王)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김해 김씨가 되었지만 김해 허씨 등은 어머니 허황후의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적인 ‘금관고사급허성제문집(金官古事及許性齊文集)’은 허황후는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 거등은 태자에 봉해졌고 차자는 어머니의 성을 좇아 허씨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형제간이기 때문에 통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씨가 포함된 데는 신라 경덕왕 14년(755)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알려지고 있는 허기(許寄)와 관련이 있는데, 그는 안록산의 난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고 당나라 현종을 따라 촉나라(蜀國)로 피란했다. 난이 평정된 후 현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종성(宗姓)인 이씨 성을 하사했는데 이후 허씨는 이씨와 복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인천 이씨는 양천 허씨에서 갈라진 태인 허씨에서 다시 갈라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원래 김해 허씨로, 왕건이 견훤과 싸울 때 군량을 공급한 공으로 공암(양천)을 식읍으로 받았는데 여기에서 허사문(許士文)을 시조로 하는 태인 허씨가 갈라져 나왔고, 태인 허씨에서 다시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는 인천 이씨가 갈라져 나왔다.
이처럼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은 모두 같은 시조에서 갈라진 한핏줄이며, 그래서 이들은 서로 다른 성씨에도 불구하고 가락중앙종친회에 함께 소속되어 있다.
●결혼 금하는 청송 심씨와 나주 박씨
반면 서로에 대한 원한 때문에 혼인을 거부하던 성씨들도 있었는데 청송 심씨와 나주 박씨가 한때 그랬다.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의 부친 심온(沈溫)은 세종의 즉위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세종 즉위년(1418)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갔다가 그를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었던 것이 상왕 태종의 심기를 건드려 화를 당한다.
태종은 심온의 동생 심정이 총제(摠制)로 있으면서 ‘금위(禁衛) 군사로 상왕(태종)과 주상(세종) 두 분을 호위하려니 숫자가 적다’며 불평한 것을 역모로 몰아 고문 끝에 심온을 끌어들인다. 귀국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사형 당한 심온은 이를 좌상 박은(朴誾)의 무고 탓으로 돌려 ‘이후로는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두 집안이 혼인하는 예가 드물었는데, 사실상 심온을 죽인 인물은 박은이 아니라 태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당파 따라 옷고름 달리 매기도
조선 후기에는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로 다른 당파끼리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당파에 따라 옷고름 매는 방법까지 달라 멀리서 봐도 서로 무슨 당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니 그 정도의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조상을 섬기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과거의 원한이나 당쟁 시절의 잘못된 유산까지 계승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매일처럼 신문지상에 넘쳐나는 현대판 당쟁들을 볼 때마다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