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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례묘 추정지 동자석 17세기 양식으로..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19-12-07 14:14
조회
43693

제주사람들에게 관심을 끈 무덤

1997년 탐라사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조선시대 무덤이 처음 발굴되었다. 이 발굴은 당시 세간의 관심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 무덤의 주인이 고려 말과 조선초에 생존했던 탐라의 마지막 성주 고봉례의 무덤일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었다.『고씨세보(髙氏世譜』에 '좌도지관(左都知管) 고봉례(髙鳳禮)의 묘가 화북·거로 지경에 부부 합장묘로 안치되었다'라는 내용이 있고, 구전(口傳)으로나 능동산이라는 지명으로 보아 무덤 주인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 발굴하게 된 것이다.

현재 거로 능동산에는 발굴한 후 복원해 놓은 두 기의 무덤이 해발 70여 미터에 이르는 나지막한 남쪽 자락에 나란히 누워 있다. 능동산이란 말 그대로 '능이 있는 동산'이라는 뜻인데, 능(陵)은 일반 서민의 무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릉을 지칭하는 무덤을 말한다. 이 지명으로 보면 이 동산에 왕과 같은 권력자의 무덤이 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이 능동산에 조성된 두 기 모두 흔히 고려시대 무덤 양식이라고 부르는 방형의 무덤이다.

무덤의 크기는 관찰자 시점에서 우측 무덤이 가로 3.35m, 세로 4.2m, 좌측 무덤이 가로 3.1m, 세로 4.16m 정도로 두 기가 비슷하다. 무덤의 형식은 봉토의 주변에 다듬어진 판석과 할석을 세워서 사각형으로 두르고 봉분의 중앙에 나무 관을 묻은 토광이 있으나 목관을 안치했다는 나무(木質)나 쇠못(鐵釘)이 없다. 목관이 안치돼 있었지만 도굴로 인해 무덤이 훼손되면서 수분 침투로 삭아 없어졌다고 볼 수가 있다.

고봉례 추정 무덤의 발굴 결과는「탐라성주고봉례묘추정지(耽羅星主髙鳳禮墓推定址)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피장자의 신분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지석(誌石)이 없는 까닭에 무덤 주인과 무덤의 조성 시기가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오래전에 이미 몇 차례 도굴을 당한 터라 발굴된 유물 또한 적을 수밖에 없었다. 두 기의 방형 석곽목관묘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백자편 3점, 흑상감청자편 1점이었고(A구역), 이 방형 석곽목관묘와 병행해서 발굴했던 인근 토광묘 3기(B구역)에서는 분청편 1점, 백자편 4점이 발견되었다. 또 이 구역에서 발굴된 석물관련 유물로는 목이 부러진 조면암재 동자석 1기, 현무암재 상석, 대석, 토신단 등이 있다. 보고서는 출토 유물을 종합하여 A구역 방형의 석곽목관묘를 일반 신분의 묘가 아닌 탐라성주 고봉례의 부부의 쌍묘일 가능성으로 보았고, 인근 B구역 3기의 토광묘 가운데 2기는 조선 중기 이후, 1기는 조선 말기의 무덤으로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 탐라성주 고봉례

고봉례는 고신걸(髙臣傑)의 셋째 아들이다. 신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위로 두 명이 일찍 죽고, 봉례(鳳禮)와 봉지(鳳智)가 남았다. 봉례(鳳禮)의 자는 백공(伯恭)이다. 1386년 추7월에 탐라의 사람들이 말을 조공하는 일로 반란을 자주 일으키니 대호군(大護軍) 진여의(陳汝義)와 전의부정(典醫副正) 이행(李行, 1352~1432)에게 탐라에 가서 말을 가져오게 하였고, 1387년 4월에 탐라성주의 아들 고봉례를 인질로 삼으면서 그에게 군기소윤(軍器少尹)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이듬해 고봉례를 제주축마겸안무별감(濟州畜馬兼按撫別監)에 제수했다. 고봉례는 정권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자 즉시 양마(良馬)를 바쳐 조선에 충성심을 보였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에게 쌀을 하사하였다. 태종 2년(1402) 고봉례는 왕자 문충세와 함께 상경하여 세습된 성주·왕자 칭호를 바꾸어 주도록 건의하니 조정에서는 성주(星主) 대신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왕자에게는 우도지관(右都知管)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때부터 신라 이래 세습된 성주·왕자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 후 그는 통정대부 공조좌참의(通政大夫工曹左參議)를 거쳐 1407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總制), 1410년에는 제주안무사가 되었다. 고봉례가 말을 자주 바치자 조정에서는 그때마다 쌀을 하사하였다. 1411년 8월, 아들 상온(尙溫)에게 자신의 직위인 제주도주관좌도지관(濟州都洲官左都知管)을 세습해줄 것을 청하고 같은 11월 29일 한성에서 생을 마쳤다. 이 소식을 접한 태종은 매우 슬퍼하면서 섬을 떠나 자신에게 충정을 바친 고봉례에게 관곽, 백지, 초, 쌀 등 장례비용을 후하게 부조하라고 전지하였다.

고봉례가 죽기 전 7월 4일, 그의 동생 고봉지(髙鳳智)는 상호군(上護軍)의 벼슬에 있다가 제주에 귀향하였고 섬에서 병을 얻어 먼저 사망하였다. 봉지(鳳智)는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 영곡(瀛谷) 고득종(髙得宗)의 아버지다. 고득종은 조정의 부의(賻儀)를 받고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제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버지 무덤 곁에다 여막(廬幕)을 짓고 3년 상을 치렀다. 고 김인호선생은, "제주인의 장법은 원래 '上不起墳 深葬無標' 였으나 아버지 고봉지의 장례를 치른 고득종으로부터 제주 최초의 매장풍습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이것이 제주인의 유교식 상·장례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탐라성주 고봉례묘 추정지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주변에 있었던 목이 부러진 동자석 1기 때문이다. 동자석은 자기편과 마찬가지로 편년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조형적인 자료가 된다. 이 동자석의 편년을 밝힘으로써 제주도 무덤 석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동자석의 양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올바로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굴된 동자석은 전체길이 69cm, 넓이가 29cm, 두께 19cm이며 재료는 조면암으로 만들어졌다. 동자석의 후두(後頭)에 머리를 말아 올린 것으로 보아 동자(童子)의 표현 중 동녀(童女)에 해당한다. 물론 동남동녀(童男童女)를 일컬어 '동자(童子)'라고 부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자(子)' 자(字)가 단지 '아들'과 같이 남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 자(子)'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남동녀의 석상이 무덤에 혼재돼 있어도 이를 동자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동자석은 제주도 동자석의 양식 중 초기에 속하는 것이다.

도굴된 김만일 무덤의 동자석 양식보다는 조금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김만일 무덤의 동자석은 17세기 초의 양식으로서 이 동자석보다는 고형(古形)에 속한다. 이 동자석은 김만일 무덤의 동자석처럼 손에 기물(器物)을 들지 않았다. 어렵게 조각한 듯 얼굴에 중점을 두었다. 옷은 두루마기를 입었고 허리에는 대(帶)를 둘렀다. 매우 고졸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조각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민중창작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조성된 탐라성주 고봉례 추정묘에는 처음부터 석상을 갖추지 않았고, 제주에 동자석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7세기부터라는 사실로 압축할 수가 있을 것이다. 김유정 /미술평론가

-자료출처 : 제민일보 2009년 11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