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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벽랑국(碧浪國) 삼공주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9-08-24 16:01
조회
412


고・양・부 삼성사재단은 삼성혈에서 용출한 탐라시조인 삼신인이 삼공주를 맞아 혼례를 올렸다는 신화의 발상지인 혼인지에서 2005년부터 추원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아래내용을 참조바랍니다.

1. 탐라국 건국신화

요즈음 역사학자와 제주사람들이 완도지역이 옛날 벽랑국(碧浪國)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서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제주도는 옛날 탐라국(耽羅國)이었다. 탐라국은 (영주지瀛州誌-정이오1354~1434 著) 지금부터 4300여년전에 삼성혈(三姓穴)[제주시 이도일동1313번지]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3신인이 태어났다. 이들은 사냥을 하여 육식을 하고, 짐승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살았다.

어느날 성산면 온평리 연혼포(延婚浦)에 배가 한척 도착하였다. 배안에는 사자(使者)와 미혼의 3공주(公主)가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사자가 이르기를 “나는 벽랑국 사자입니다. 우리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서해 가운데 신자(神子) 3인이 내려와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구나’ 하시고서는 신에 명하여 3공주를 모시고 왔으니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하고는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3신인과 3공주는 나이 순에 따라 짝을 지어 탐라국을 세우고 번창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오늘날까지 제주에 전해져 오고 있다. 전설의 유적지로는

삼성혈(三姓穴) [제주시 이도일동 1313번지 : 사적 제134호],
연혼포(延婚浦) [남제주군 성산읍 온평리 해변],
혼인지(婚姻址) [남제주군 성산읍 온평리 1693번지 :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7호],
사시장올악(射矢長兀岳) [제주시 화북동1380번지]
삼사석(三射石)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호]이 있다.

2. 벽랑국(碧浪國)

전설에 의하면 제주사람들의 시조는 삼성혈에서 태어난 3신인과 벽랑국에서 온 3공주의 후손인 셈이다. 그러면 벽랑국은 어디에 있었던 나라일까? 벽랑국이 어디에 있던 나라인지는 문헌사료나 유적,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히 알길이 없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부족국가시대에 완도지방에 있던 소국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 채바다(제주 향토사학자)

채바다는 벽랑국이 완도지방의 고대 소국이었을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는 완도 인근의 지명과 전설, 지리적인 근접성 등을 들어 완도가 벽랑국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벽랑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문헌을 보면 고려사지리지(벽랑도:탐진현1454년), 동국여지승람(벽랑도:강진현1486년), 신증동국여지승람(벽랑도:강진현1530년), 동여도(벽랑도:강진현1861년), 대동여지도(벽랑도:강진현1864년)에 벽랑도의 기록이 보인다.

강진현에 속하는 도서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완도, 고금, 약산, 신지, 청산 등이었으므로 지금의 완도군 관할지역이다. 이는 고대 국가인  벽랑국이 완도에 존재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채바다는 지리적으로도 육지와 최단거리의 완도군 지역과 사람과 문물의 교류가 빈번하게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 전경수(서울대 인류학 교수)

전경수는 ‘영주지(1400년 무렵)’의 ‘벽랑국’과 양성지가 작성한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의 ‘일본국’이 ‘영주지’의 자료를 제공한 고득종의 고씨 집안과 양성지의 양씨 집안이 서로 집안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정치권력의 출자지를 차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벽랑국’이냐 ‘일본국’이냐 하는 지명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제주와 근접지역간의 사람과 문물의 교류에서 찾는 것이 전설이나 문헌의 기록을 다치지 않고 양자를 살리면서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바른 길이라고 권고하고 있다.

전경수 교수는 실례로 ‘해녀(海女)’라는 단어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 있다. 해녀에 관한 용어는 ‘해녀(금당도선유기-위백규)’, ‘잠여(潛女)[북헌집-김춘택]’, ‘채곽여(採藿女)[응와전집凝窩全集-이원조]’의 3개 용어가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지금도 해녀와 잠여는 제주와 완도지방에서 쓰고 있는 말이다. “해녀”와 “잠여” 및 “채곽여”는 제주도와 탐진항로(제주~강진항로) 사이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언어현상이다. 이는 제주와 탐진항로상에 있는 완도지역이 동질적인 여성잠수문화(女性潛嫂文化)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동일한 현상이 흑산도나 진도 등지를 기록한 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탐진항로가 보여주는 문화적 동질성을 논증할 수 있는 항목 중의 하나가 여성잠수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전경수 교수는 “전설상의 지명에 매달리지만 말고 인적,물적 교류와 지정학적인 접근성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 김정호(진도문화원장, 전 무등일보 편집국장)

김정호(진도문화원장)는 3공주가 일본국에서 왔다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은 ‘일본’이라는 국호가 670년부터 사용되었으므로 채택할 기록이 못된다고 한다.‘영주지’에 의하면 3신인이 탐라국을 세운 것은 단군이 조선을 개국한 해와 같다고 하였다. ‘영주지’에 보이는 ‘벽랑국’은 우리의 옛지도에서 찾아야한다고 말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후기까지의 각종 지지에는 ‘벽랑도’가 강진현의 섬으로 기록되어 있다. 완도군이 설군된 1896년이전에는 완도, 고금, 신지, 약산 등이 강진현에 속하였다.  ‘벽랑’은 ‘청해’와 같은 뜻이므로 완도해역을 벽랑해역이라 할 수 있다. 제주도민의 성씨를 보면 한반도나 중국, 월남지역의 성씨들이다. 일본계 성씨는 없다. 반면에 제주와 강진 사이에는 제주와 연관된 문헌과 유적이 즐비하다.

강진과 해남 연안에는 제주사람들이 경영하던 옹기가마터가 여럿 있다. 제주 고득종(세종 때 도전운사)은 해남 화산면 관동을 제주왕래 관로로 이용했다. 윤두서는 해남 현산면 백포를 통해 제주와 무역을 하였다.

강진현 남쪽13리에 고양당(髙梁堂)이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 고씨와 양씨들의 사당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는 곳이다. 지금의 칠량면 구로리의 강진만으로 돌출한 곶이 유력하다고 한다(양광식 강진군 학예전문위원). 제주양씨들의 기일세조(起一世祖) 양보숭의 무덤은 칠량면에 있다고 하며, 장택고씨(=장흥고씨)의 터자리도 칠량에 있다.

완도 해역은 200여개의 섬이 겹겹으로 성곽처럼 둘러싸고 있는 지중해(地中海)로 그 내만인 강진만은 영산강 유역과 더불어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땅이었을 것이다. 이 지역들이 중국의 강남해양문화와 농경기술이 유입된 선진지였음을 생각할 때 파도와 바람을 타고 살았던 벽랑국은 완도 해역이었을 가능성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라.  김희문(완도문화원장)

김희문은 “영주지”의 벽랑국을 여서도로 추정하고 있다.

마. 결   론

채바다, 전경수, 김정호 등은 ‘벽랑국’이라는 지명에 매달리는 것보다 완도와 제주간의 인적,물적 교류와 문화의 동질성에서 찾아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영주지”는 벽랑국의 3공주가 탐라에 도착했을 당시의 탐라와 벽랑국의 문명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벽랑국에서 3공주와 함께 망아지, 송아지, 오곡의 종자를 가져왔다고 한다.

사자는 붉은 허리띠를 하고 자주색 옷을 입었으며, 3공주는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그 것들은 벽랑국의 문물을 나타내고 있다. 망아지와 송아지는 동물을 가축화하였고, 오곡의 종자는 발달된 농경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채색된 의복은 직조기술과 가봉기술, 염색기술이 발달된 문명의 집단임을 알 수 있다.

나라이름, 왕, 사자, 공주의 직함은 벽랑국이 국가조직을 가진 정치집단임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탐라의 3신인은 사냥을 하여 고기를 식량으로 하고, 가죽으로 옷을 해입었으며, 동굴에서 신방을 차린 것으로 보아 수렵채집시대의 생활상을 보여 주고 있다. 사회조직도 씨족단위의 소집단임을 나타내고 있다. 탐라의 수렵채집인이 선진문명인 벽랑국의 농경문화를 받아 들이는 모습을 신화는 말하고 있다.

탐라에 농경과 가축, 직조, 의상, 국가조직을 전한 벽랑국은 어디에 있었을가. 채바다, 전경수, 김정호, 김희문은 벽랑국을 완도일원의 해상세력으로 보고 있다. 그 연유는 벽랑도라는 지명에서 찾기 보다는 제주와 탐진항로에서 찾고 있다. 문헌과 유적, 말과 생활상, 문화의 동질․유사성, 지리적 접근성, 해류와 조류, 계절풍 등을 이용하는 항로 등에서 제주와 완도는 긴밀한 관계에 있다. 앞에서 제현의 고찰이 있었으므로 빠진부분만 보태려고 한다.

1) 지리적 근접성

한국의 남단에서 제주로가는 최단거리는 완도이며 가장 안전한 뱃길도 완도에서 가는 길이다. 제주에서 가장 가까운 유인도는 여서도이다. 다음으로 가까운 유인도는 하추자도다. 제주도에서 여서항까지 47㎞이고 하추자항은 50㎞이다. 하추자항에서 완도군 소안면 맹선항까지는 36㎞, 맹선항에서 완도항 또는 이진까지가 30㎞이고, 여서항에서 청산면 도청항까지는 22㎞이며, 도청항에서 완도항까지는 18㎞ 이다.

직선거리상으로는 제주도-여서도-청산도-완도가 최단거리(87㎞)이다. 제주-하추자항-맹선항-완도항은 거리상으로는 더 멀지만(116㎞) 더 안전한 뱃길이다. 다른 지역에서 제주를 건너가려면 훨씬 먼거리를 항해해야 한다. 또한 여서도나 추자도 둘 중에 하나를 거쳐가게 되어 있다. 탐라국시대에 육지와의 통교는 여서도와 추자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이 두 섬은 완도 본도와 제주도에서 빤히 보이는 섬으로 항해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므로 항로상의 요충이 될 수 밖에 없다.

2) 인적교류와 생업

제주도의 해녀들은 완도군의 여러 섬에 와서 전복, 소라, 성게 등을 채취하였다. 완도의 수산물채취업자들이 제주 해녀를 고용하였다. 제주 해녀들은 완도 사람들과 결혼하여 완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소안, 보길, 청산에 많이 살고 있다. 제주도에 가서 눌러 사는 완도 사람도 적지 않다. 소안, 보길, 청산의 토박이 여자들이 해녀생활을 하는 사람도 제법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잠수기를 이용하여 전복, 소라 등을 채취하던 잠숫배(潛嫂船)를 경영하는 업자들은 제주와 완도를 오가며 채취사업을 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잠숫배를 운영하는 사람은 지역의 부자였다. 육지에 방앗간을 경영하는 사람보다 더 부자였다.

3) 물   류

조선시대에 제주로 가는 최남단 포구는 이진(梨津)[해남군]이었다. 이진에는 몇해 전까지만해도 마을의 돌담이나 집안의 남새밭 모퉁이에는 제주도의 화산석이 많았다. 수석 애호가들이 하나 둘 주워가고 지금은 흔하지 않다. 제주에서 말을 싣고 올때 배 밑창에 돌을 실어 배의 흔들림을 적게 하였다. 제주로 돌아 갈때는 곡식을 실고 가므로 돌을 내려 놓고 갔다. 이진-소안 맹선항-추자항-제주항의 뱃길이 제주와 육지간의 주요 항로였음을 증거하는 유물이다. 이진항과 소안, 보길에는 유배자들의 얘기가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송시열, 추사 김정희 등도 이 뱃길을 따라 오갔다.

4) 해   류

해류의 흐름도 제주와 완도간의 교류에 한 못 하였다. 동북아시아 해상에는 필리핀 동부해역에서 발생한 난류(일명 구로시오 난류)가 북상한다. 이 난류는 대만동부에서 3갈래로 나뉘어 북상한다. 한갈래는 중국동해안과 제주도 사이로 북상하고, 또 한갈래는 제주도와 일본의 규슈 사이를 지나 동해로 들어가며, 마지막 한 갈래는 일본의 남해안을 따라 북동쪽으로 흐른다. 이 난류는 시속 약 3노트의 속도로 흐른다. 제주도 서쪽으로 북상한 난류는 완도와 진도해역으로 흐른다. 제주도에서 완도해역으로 항해할때에는 구로시오난류를 타면 쉽게 항해할 수 있다.

5) 계절풍

계절풍은 고대 장거리항해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바람이 없으면 며칠이고 기다렸다가 출항하였다.(엔닌의“입당구법순례행기”) 봄, 여름에는 남동풍을 이용하여 제주에서 완도로 항해하기 좋고, 가을과 겨울에는 북서풍을 이용하여 완도에서 제주로 항해하기 쉽다.

6) 맺는 말

완도와 제주간에는 인적, 물적 교류와 지리적 접근성이 인근의 시군보다 매우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의 수렵채집인들이 농업문명과 국가조직체계를 받아들이어 탐라국을 세우는 과정을 ‘영주지’의 신화는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 동아시아의 선진문명의 전파루트로 볼때 한반도의 벽랑국에서 제주도로 건너간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한반도에서 제주로 가는 주요항로는 완도지방이 유력하다는 것은 앞에서 밝혔다.

벽랑국은 인문지리나 자연지리적으로 볼때 완도지방의 해양 소국이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라나라의 역사는 외세에 의하여 삼국시대 이후로 축소되어 왔다. 말로는 5천년의 역사라고 하면서 2천년의 역사만 담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의 역사는 중국의 사서에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으로 유적․유물도 수없이 발견, 발굴되고 있다. 3국시대 이전의 우리 역사는 중국의 사서들에서 분명한 모습으로 조금씩 얼굴을 내 밀고 있다.

고조선, 마한의 역사속에 벽랑국이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지금까지의 고찰만으로도 제주와 완도가 탐라국과 벽랑국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문화계의 거장 이어령은 탐라국 건국신화는 세계적인 축제로 발전시킬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소재라고 평가하였다. 제주와 완도가 과거에 물적, 인적 교류가 매우 빈번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는 더욱 긴밀해질것으로 내다 본다.

특히 완도읍과 남창간의 4차선도로만 개통되어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완도와 제주간은 더욱 긴밀해질 것이고 그만큼 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될것이 틀림없다. 탐라국 건국신화는 완도와 제주가 결혼동맹을 맺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상호 도민의 뿌리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탐라건국신화의 재현은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3. 제 안

탐라국과 벽랑국(완도)의 역사를 재현하는 행사를 제안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탐라국과 벽랑국의 결혼식”을 재현하자는 것이다. 제주에서는 총각3명을 뽑고, 완도에서는 처녀 3명을 뽑아서 혼례를 올리는 것이다. 이듬해에는 서로 바꿔 뽑는다. 물론 결혼식은 행사일뿐 정식결혼은 아니다. 서로 좋아서 결혼까지 가겠다면 상금을 내릴 일이다. 제주에서 떼배에 총각 3명을 싣고 바다를 건너 온다.

안전을 위하여 해경 순시선 3척이 호위하여 완도읍에서 완도에서 뽑은 3명의 처녀와 혼례를 올린다. 혼례은 전통혼례가 제격일 것이다. 하룻밤을 완도에서 자면서 신방을 차리고 다음날 3쌍의 신혼부부가 망아지, 송아지, 오곡의 씨앗을 떼배에 싣고 사신의 인도하에 해경순시선의 호위를 받으며 제주로 간다. 제주에서는 신랑신부를 맞아 탐라국건국과정을 재현한다. 축제의 소재로 매우 매력적인 가치가 있다고 본다. 주민의 참여, 관심, 흥미를 유발할 수 있고, 차별성이 높은 고유의 좋은 소재이다.

<완도신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