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원(髙宗遠) 임진왜란때 고씨동굴(髙氏洞窟)로 피신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11:53
조회
460
153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근(士近), 호는 화수, 화전군파(花田君派) 인비(仁庇)의 10세손이며 안릉참봉(安陵參奉) 광후(廣後)의 3남으로 중종 33년(1538) 5월 18일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6월 26일 영남지방의 전병사(前兵使)인 김성일(金誠一)과 호남지방의 동래 부사였던 고경명(髙敬命)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감격하여 도내 각읍에 통문(通文)을 돌려 군량(軍糧)과 병기주철(兵器鑄鐵)을 모으고 청장년을 소집하여 적과 싸우게 하였다.
이때 공(公)의 중제(仲弟) 종경(宗慶)은 향인이 대회를 가진 자리에서 문무의 재능인 춘천과 홍천사이를 수비코저 하던 차에 도백(道伯)이 그 솔선창의(率先倡義)를 가상히 여겨 관군 오백명을 첨송(添送)해 주며 흥원진(興原陣 흥업면 소재)을 원조케 했는데 행군도중 관군의 도망이 심해 이를 추포(追捕)하느라 기일을 어기게 됨에 관찰사 종경의 지휘책임을 물어 처형을 지시하였다.
이때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 전부사(前俯使), 윤면(尹勉), 선전관(宣傳官) 신경징(申景澄) 교관(敎官) 홍식(洪湜)등이 창의(倡義)인재임을 들어 사죄성공케 하려고 힘썼으며 권군수(權郡守)도 공의(公儀)로 사죄공문(赦罪公文)을 감영(監營)에 보냈으나 공문(公文)은 길이 막혀 전달치 못하게 되니 관찰사가 지원해준 병사들의 탈영을 막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참으로 애통가석(哀痛可惜)한 일이다. 후일에 조정에서 명령전도(命令顚到)의 책임을 물어 관찰사는 파출(罷黜)되었다.
8월 17일 적이 영월에 쳐 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을 이끌고 노리곡(지금의 진별리 고씨동굴) 석굴 안으로 피난했다. 다음날에 적이 굴 안에 불을 지펴 생포하려 하자 부인 조씨(曺氏)는 남편의 행동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굴 안 벽상에서 투신자결하였고, 계제(季弟)종길과 같이 잡혀 원주로 압송되어 목책(木柵)속에 수감되었다.
9월 1일 폭우가 심한 밤을 틈타 탈출에 성공하여 권군수(權郡守)는 평창으로 무사히 돌아가고 형제는 영월로 가다가 단구역(丹邱驛) 근처에서 적에 잡혀 종길은 그 자리에서 죽고, 공(公)은 요행이 방면돼 9월 6일 포로된지 20일 만에 천신만고 끝에 영월에 돌아와 노친(老親)(71세)을 만났다.
전란을 치르면서 부인과 두 아우를 잃은 고종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인 1592년4월 20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9월 6일까지의 사건을 기록한 기천록(祈天錄)이 남아있다.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된 영월 고씨동굴(髙氏洞窟, 천연기념물 제219호)은 고종원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신하였던 동굴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자는 사근(士近), 호는 화수, 화전군파(花田君派) 인비(仁庇)의 10세손이며 안릉참봉(安陵參奉) 광후(廣後)의 3남으로 중종 33년(1538) 5월 18일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6월 26일 영남지방의 전병사(前兵使)인 김성일(金誠一)과 호남지방의 동래 부사였던 고경명(髙敬命)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감격하여 도내 각읍에 통문(通文)을 돌려 군량(軍糧)과 병기주철(兵器鑄鐵)을 모으고 청장년을 소집하여 적과 싸우게 하였다.
이때 공(公)의 중제(仲弟) 종경(宗慶)은 향인이 대회를 가진 자리에서 문무의 재능인 춘천과 홍천사이를 수비코저 하던 차에 도백(道伯)이 그 솔선창의(率先倡義)를 가상히 여겨 관군 오백명을 첨송(添送)해 주며 흥원진(興原陣 흥업면 소재)을 원조케 했는데 행군도중 관군의 도망이 심해 이를 추포(追捕)하느라 기일을 어기게 됨에 관찰사 종경의 지휘책임을 물어 처형을 지시하였다.
이때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 전부사(前俯使), 윤면(尹勉), 선전관(宣傳官) 신경징(申景澄) 교관(敎官) 홍식(洪湜)등이 창의(倡義)인재임을 들어 사죄성공케 하려고 힘썼으며 권군수(權郡守)도 공의(公儀)로 사죄공문(赦罪公文)을 감영(監營)에 보냈으나 공문(公文)은 길이 막혀 전달치 못하게 되니 관찰사가 지원해준 병사들의 탈영을 막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참으로 애통가석(哀痛可惜)한 일이다. 후일에 조정에서 명령전도(命令顚到)의 책임을 물어 관찰사는 파출(罷黜)되었다.
8월 17일 적이 영월에 쳐 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을 이끌고 노리곡(지금의 진별리 고씨동굴) 석굴 안으로 피난했다. 다음날에 적이 굴 안에 불을 지펴 생포하려 하자 부인 조씨(曺氏)는 남편의 행동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굴 안 벽상에서 투신자결하였고, 계제(季弟)종길과 같이 잡혀 원주로 압송되어 목책(木柵)속에 수감되었다.
9월 1일 폭우가 심한 밤을 틈타 탈출에 성공하여 권군수(權郡守)는 평창으로 무사히 돌아가고 형제는 영월로 가다가 단구역(丹邱驛) 근처에서 적에 잡혀 종길은 그 자리에서 죽고, 공(公)은 요행이 방면돼 9월 6일 포로된지 20일 만에 천신만고 끝에 영월에 돌아와 노친(老親)(71세)을 만났다.
전란을 치르면서 부인과 두 아우를 잃은 고종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인 1592년4월 20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9월 6일까지의 사건을 기록한 기천록(祈天錄)이 남아있다.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된 영월 고씨동굴(髙氏洞窟, 천연기념물 제219호)은 고종원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신하였던 동굴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