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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빛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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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훈(髙貞勳) 언론인・정치인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11:51
조회
127
1920∼1988. 언론인·정치인.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

1941년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독실한 기독교가정에서 자랐으며 1945년 만주 하얼빈 북만학원대학(北滿學院大學) 노문과를 다니면서 영어·러시아어·중국어·프랑스어 등을 익혔다.

1947년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통역관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육군사관학교 제7기 특별반을 졸업하였다.

1949년 육군본부 정보국차장을 거쳐, 1950년 중령으로 예편한 뒤 언론계에 투신하였다.
1951년 코리언 리퍼불릭 편집국장, 같은해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4·19혁명으로 정치적 자유가 신장되자, 혁신운동에 투신하였다.

1960년 구국청년당(救國靑年黨)을 창당, 대표가 되었고 1961년 통일사회당 선전국장을 지냈다. 한때는 김구(金九) 암살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하였다가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진보적인 혁신운동에 열중한 탓에 5·16 이후 좌익으로 몰려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으로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정치범으로 복역하였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복역중에 쓴 《옥중일기》에서 “나를 감옥에 가둘 수는 있어도 민족주체성에 입각한 승공, 민주사회주의의 사상을 골방에 가둬둘 수는 없다.”고 외쳤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완전히 다른 사상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면서 “공산주의가 민주주의의 탈을 쓴 일당독재라면, 민주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폐단을 고쳐 민주복지사회를 지향하려는 데 있다.”고 민주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1968년 한때 아진화성(亞進化成) 회장 등 사업가로 변신한 듯하였으나 중도에서 포기하고 철원에서 수년간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혁신운동에의 집념을 버리지 못하여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혁신정당 개방정책에 따라 1981년 민사당(民社黨) 당수로서 정책지구인 서울 강남에서 출마, 제11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제12대 총선에서 낙선, 우리 사회의 보수의 벽을 실감하며 정계를 은퇴하였다. 수교훈장 흥인장(興仁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