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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공훈 인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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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평(髙平) 독립군 [건국훈장 독립장]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7 01:41
조회
42281

▒ 공적내용

전북 정읍(井邑) 출생.

1902년 서울 보광중학교(普光中學校)를 졸업하고 이어 경성관립법관양성소(京城官立法官養成所)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 뒤 1905년 4월에는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 검사(檢事)에 임명되었다. 한편 불교에 심취, 1906∼1910년간에는 전북 부안(扶安) 내소사(來蘇寺)에 유거(留居)하면서 불교철학을 공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1911년 7월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한 후 남도(南道)·동도본사(東道本司) 등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그뒤 1919년 2월 18일에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 하장리(下場里)의 박동원(朴東轅, 延吉道尹公署外交科員) 집에서 구춘선(具春先)·김영학(金永學)·유예균(劉禮均) 등 33인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리하여 간도지방의 모든 교회와 단체는 독립선언서가 발표 되는대로 독립만세를 절규하기로 결의함으로써 같은 해 용정(龍井)에서 3·13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어 같은 해 4월, 간도에서 조직된 조선독립기성총회장(朝鮮獨立期成總會長)의 지시에 따라 고덕승(高德勝)·이상호(李相鎬)·지 송(池松) 등과 함께 인근지역 사방으로 파견되어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해 일경에게 피체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하여 활동하다가 노령(露領)에서 개최된 신국민대회(新國民大會)에서 서 일(徐一)·구춘선(具春先)·서왈보(徐曰輔)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이시기에 또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 의군부(義軍府)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본부 총재에 이범윤(李範允), 총사령에 김현규(金鉉圭), 참모장에 진학신(秦學新) 등으로 배치될 때 중부 의군부(中部義軍府) 참모장(參謀長)으로 임명되어, 실제 중심세력으로 5개 대대를 보유하였다. 1920년 8월 하순에는 중국 토군(土軍)이 일제에게 매수(買收)당해 내습(來襲)한다는 정보에 접하여 150명으로 감사대(敢死隊)를 조직, 노야령(老爺嶺)에서 전투를 벌여 중국 토군을 격퇴하고 일군에게는 대타격을 가하였다.

그 뒤, 청산리대첩을 거두고 난 다음 밀산(密山)을 경유, 노령(露領)으로 들어가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함께 러시아로 들어갔으나, 1921년 6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일어나자 원래의 활동 근거지인 연길로 되돌아와 의군부 재기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1월에는 연길현 춘양향(春陽鄕) 합마당(蛤 塘)에 위치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군정사군무서(軍政司軍務署) 독판(督辦) 서 일(徐一) 휘하에서 김덕현(金德賢)·손범철(孫範哲) 등과 함께 군정회의원(軍政會議員)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어 1923년 5월에는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總司令)에 김규식(金奎植)을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에 피임되어 병력이 4백여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군사훈련과 조직을 강화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로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둔전제(屯田制)를 택하는 한편, 노령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해오는 등 군세를 확충하였으나 실제 항전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뒤 1928년 재만동지회(在滿同志會)를 조직하여 이주 한인의 생활정착에 힘쓰다가 중국 관내(關內)로 이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828·829·904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7·14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4권 92면

·무장독립운동비사 76·77·105·106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00·308·309·32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696·699·70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338·339·423·68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