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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공훈 인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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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순(髙喜淳) 독립군 [건국훈장 애국장]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6 22:39
조회
42104

▒ 공적내용

일제는 1907년 헤이그특사 활동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같은 해 7월에는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는데 그 비밀각서에는 대한제국군의 해산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한제국군은 서울의 시위대(侍衛隊) 5개 대대와 지방의 진위대(鎭衛隊) 8개 대대로서 이의 해산은 곧 일제의 침략에 맞설 정규군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대한제국의 앞길은 풍전등화와 같이 되었다.

일제는 한국군대 해산을 위해 기존 제13사단 병력 외에 제12여단을 증파하였고 총기 60,000여 정도 새로 들여왔다. 이와 같이 그들 나름으로 모든 준비를 갖춘 후 8월 1일 도수(徒手)체조 연습을 한다고 속이고 비무장으로 대한제국 시위대군을 훈련원에 집합시켜 강제로 군대를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에 항거하여 시위대 제1, 2연대의 각 1대대는 부대 전체가 항쟁에 돌입하였다. 이것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항의 자결에 충격받은 병사들의 노도같은 봉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훈련원으로 출발 직전 대대장의 자결 사실을 알게되자, 전부대원이 재무장하고 봉기했던 것이다. 이는 곧 옆에 있던 제2연대 1대대에도 파급되어 그들도 재무장하고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불꽃 튀는 격전을 벌였다. 양 대대의 병력은 1,182명인데 기관총 3문을 앞세운 일본 침략군과의 교전은 대한제국 최후의 항전과도 같았다. 그러므로 남대문과 서소문에 이르는 이날의 항전장은 피바다를 이루었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 미미(梶尾) 중대장을 비롯하여 4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가 있었으나 한국군도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와 같은 군대해산 과정에서 고희순은 대한제국군 육군보병 특무정교(特務正校)로서 시위보병 제2연대 제1대대에 근무 중 같은 해 8월 1일의 시위대 강제 해산에 항거하여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官報(內閣 法制局 官報課, 1907. 9. 21) 第3877號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第1卷 633·634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