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상(髙圭相) 일제강점기 유학자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12:03
조회
386
1854년(철종 5)∼1941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문집(文執)이고, 호는 운포(雲圃)이다. 본관은 : 제주(濟州)이고, 전라북도 군산시(群山市) 옥구군(沃溝郡) 임피면(臨陂面) 월하리(月河里)에서 태어났다.
문충공(文忠公)고경(髙慶)의 후손이며, 고정량(髙廷良)의 아들이다.
그는 연재(淵齎)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송병선은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을 임금에게 상소(上疏)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본 헌병대에 의해서 강제로 고향으로 이송되자, 음독자살을 하여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는 이런 스승 아래서 학문을 익히고 석학(碩學)이 되었다.
관직은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지냈다.
성품이 온순하면서도 기개와 도량이 커서 집안 살림이 어려워도 늘 평안하고 한가롭게 여기며 생활하였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을 대할 때나, 부하고 귀한 사람을 대할 때나 같게 하였으며, 평생 자신의 맑고 높은 뜻을 꺾지 않고 살았다. 이로써 사림(士林)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
문충공(文忠公)고경(髙慶)의 후손이며, 고정량(髙廷良)의 아들이다.
그는 연재(淵齎)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송병선은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을 임금에게 상소(上疏)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본 헌병대에 의해서 강제로 고향으로 이송되자, 음독자살을 하여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는 이런 스승 아래서 학문을 익히고 석학(碩學)이 되었다.
관직은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지냈다.
성품이 온순하면서도 기개와 도량이 커서 집안 살림이 어려워도 늘 평안하고 한가롭게 여기며 생활하였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을 대할 때나, 부하고 귀한 사람을 대할 때나 같게 하였으며, 평생 자신의 맑고 높은 뜻을 꺾지 않고 살았다. 이로써 사림(士林)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