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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과 제주고씨의 유래에 대한 새로운 관점

작성자
고준현
작성일
2013-10-21 21:24
조회
2123
문득 제 뿌리에 관심이 생겨 공부를 해보니, 뜻밖에도 탐라국과 제주고씨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거의 객관적이라고 확신하는 내용만을 여기에 올린 것이며, 이곳 홈페이지 주인장 및 다른 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제주고씨들의 뿌리를 다 설명했다고 생각하므로, 시간날 때 천천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본 내용 중 상당수는 1999년에 서울대 강사였던 박종성 씨가 쓴 <제주지역 ‘三乙那傳承’과 ‘천지왕본풀이'>와, 서울대 명예교수인 신용섭 교수의 주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1. 탐라국의 성립 연대는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1세기 경

본 웹사이트에서는 탐라국의 시조 고을라 왕의 출생 연대를 기원전 2337에 잡지만, 사실 이건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지요.

'신화시대' 로서의 탐라국이 아니라, '역사적인' 기록으로서의 탐라국을 살펴보면 많은 학자들이 그 성립 연대를 BC 1세기~AC 1세기에 두고 있습니다. 옛 문헌을 봐도 그렇습니다.

<고려사 지리지(1451년 조선 문종 원년에 정인지(鄭麟趾)·정창손(鄭昌孫) 등에 의해 편찬된 고려왕조의 통사> 제 11 탐라현조를 보면 신라에 도착한 高厚·高淸 형제 세 사람이 15대손이라 했는데, 이 기록을 신빙한다면, 이 집단이 탐라에 터를 닦은 지가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기록에, 백제 동성왕 20년에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아 친히 정벌에 나서 무진주까지 이르자,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빌자 그만두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동성왕 20년은 498년에 해당하니 앞의 기록에서 15代를 引下하면 삼을나 출현시
기를 1세기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문헌기록이나 구비전승에서도 탐라국의 세 시조인 고·량·부을라가 출현한 때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 한명제 영평8년 을축에 붉은 기운이 남쪽 바다에서 떠올랐으니...
- 택리지(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1751년(영조 27년)에 저술한 인문 지리서)

* 擇里志에 이르기를 漢明帝 永平 八年 乙丑에 붉은 기운이 남쪽 바다에서 떠
올랐으니, 三姓의 출생이 혹 그때가 아닌가 한다고 했다. 擇里志曰 漢明帝永
平八年乙丑 紫氣浮於南溟 三姓之出疑其時歟.
- 김석익, 탐라기년(제주사람이 쓴 첫 제주통사로 평가받으며, 김석익(1885~1956) 선생이 집필)

* 대개 三姓이 출생한 것은 九韓 때가 맞다. 후한의 명제 영평 8년에 붉은 기운
이 남쪽 바다에서 떠올랐으니 삼성의 출생이 혹 그 때인 듯하다. 蓋三姓之出
正當九韓之時 後漢明帝永平八年 紫氣浮於南海 三姓之出疑其時. 編禮抄.
至十五代孫 高厚高淸昆弟三人 造舟渡海至于耽津 盖新羅盛時也 于時客星見于南方 太史奏曰 異國人
來朝之象也 遂朝新羅王嘉之 稱長子曰星主(以其動星象也) 二子曰王子(王令淸出胯下愛如己子故名之)
季子曰都內 … 後又改良爲梁.
- 제주지역, 삼을나전승(三乙那傳承)과 천지왕본풀이

* 영평 팔년(永平八年) 을축(乙丑) 삼월 열사을날 시 셍천 고의왕(高爲王)
축시 셍천 양의왕(良爲王) 인시 셍천 부의왕(夫爲王) 고량부 삼성 모은공(毛
興穴)로 솟아나 도업 던 국이웨다.
- 安仕仁, 초감제

* 영평 팔년 을축 삼월 열사을날 시에는 고의왕 축시에는 양의신충(良爲臣
忠) 인시에는 북의면(夫爲民) 설립던 섬이우다.
- 男巫 金氏, 초감제

* 고량부 삼성왕이 무운굴로 솟아지면 영평 팔년(永平八年) 을축 삼월 열 사
흘날은 시에는 고위왕 축시에는 양위왕 인시에는 부위왕 삼성왕이 도업
던 섬이우다.
- 강태욱, 초감제

상기한 문헌들은 삼성의 출현 시기를 후한의 명제 영평 8년(서기 66년)으로 못박아 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탐라국은 고구려 계통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

신용섭 서울대 명예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따르면, 탐라국은 BC 1 세기에서 AC 1세기경, 고조선문명권을 구성했던 고구려·양맥·부여족의 대이동 과정에서 건국된 뒤 섬 안의 마을공동체를 포섭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제주도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긴 했지만 탐라국을 건국한 세력은 고구려 계통의 이주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주민들은 선박의 규모상 수백명에 불과했지만, 앞선 철기 기술을 갖고 제주도 해안의 마을 공동체들을 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탐라국과 고구려의 연관성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언어 및 풍습
▷ 제주도에서 흔히 쓰였던 '을나'라는 족장의 호칭은 부여·양맥·고구려 등 북방에서 이동해온 예·맥족의 호칭이다.
▷ 3을나가 거주구역과 형제 순위를 정할 때 사용한 활쏘기는 맥족의 관습이었다.

2) 역사와 사료
▷ <일본서기(덴무 천왕의 명으로 720년 완성한 일본 최초의 역사서)>에 탐라국 왕자 고씨가 일본에 사절로 갔을 때 고구려족임을 뜻하는 '구마(久麻)'로 표기했다.
▷ <당회요(중국의 북송(北宋)대 태조(太祖) 건륭(建隆) 2년(961년)에 완성한 책)> 등 중국측 고문헌이 탐라국 국왕의 성을 부여·고구려 왕족의 성명 중 하나인 '유리(儒李)'라고 기록했다.
▷  <신당서(북송 인종 시대에 1044년 ~ 1060년에 걸쳐 완성된 역사서)> 하권을 보면, 고대 탐라의 입도 세력의 계통을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龍朔 초년에 儋羅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왕인 儒李都羅가 사신을 보내어 입조
했다. 그 나라는 신라 武州 남쪽 섬 위에 있고,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하며 옷은
큰 돼지의 가죽을 입는다. 집은 여름에는 가죽으로 만든 천막에서 살고, 겨울
이면 굴 속에 들어가서 산다. 땅에서 오곡이 나지만 땅을 가는데 소를 부릴 줄
모른다. 쇠로 쇠스랑을 만들어 땅을 판다. 이 나라는 처음에 백제에 소속되었
는데, 麟德 연중에 그 추장이 입조하여 帝를 따라 太山에 이르렀다가 그 후로
는 신라에 소속되었다. 개원 11년에 또 達末婁와 達姤의 두 部의 首領이 朝貢
하러 왔다. 그때 달말루에서 온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들은 北扶餘의 자손으로
고려(高句麗)가 그 나라를 멸하자 사람들이 那河를 건너가서 지금 이 곳에 산
다고 했다. 龍朔初 有儋羅者 其王儒李都羅遣使入朝 國居新羅武州南島上 俗朴
陋衣大豕皮 夏居革屋 冬窟室 地生五穀 耕不知用牛, 以鐵齒杷土. 初附百濟 麟
德中, 酋長來朝, 從帝至太山, 後附新羅. 開元十一年, 又有達末婁 達姤 二部首領
朝貢. 達末婁自言北扶餘之裔, 高麗滅其國, 遺人渡那河, 因居之.
- 新唐書 東夷列傳 儋羅條.

이 기록을 신빙하게 되면, 탐라에 북부여(北扶餘)에서 出自한 세력이 입도한 것이 사실로 인정된다. 儋羅는 耽羅와 相似한 音이거니와 그 위치와 백제․신라에 복속된 사정이 일치하므로 탐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탐라에는 북부여계 출자집단과 고구려계 출자 집단이 입도하였다는 점이 사실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 탐라에 입도한 본토 집단의 성격을 추찰할 수 있는 내용이 <삼국사기(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이 1145년(인종 23)에 완성한 삼국시대사)> '백제본기'와 '고구려 본기' 에도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탐라국에서 방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며 사신을 恩率로 삼았다. 耽羅國獻方
物 王喜拜使者爲恩率.
- 三國史記 26권 백제본기 4, 문주왕 2년 하4월조.

왕이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아 친히 정벌에 나서 무진주까지 이르자,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빌자 이에 그만두었다.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至武
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乃止.
- 三國史記 26권 백제본기 4, 동성왕20년 8월조.

사신을 위로 보내어 조공하니, 세종은 그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서 인견하였다.
예실불은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정성껏 대국과 관계하여 여러 번 정성
을 다해 토지의 산물을 허물없이 조공하였으나, 다만 황금은 부여로부터 나오
고, 珂玉은 涉羅(耽羅)에서 생산되는바, 부여는 물길의 좇기는 바가 되고, 섭라
는 백제가 아우른 바가 되어 이 둘을 왕부에 올리지 못하는 소이는 실로 兩賊
이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遣使入魏朝貢 世宗引見其使芮悉弗於東堂 悉弗進曰
小國係誠天極 累葉純誠地産土毛 無愆王貢 但黃金出自夫餘 珂則涉羅所産 夫餘
爲勿吉所逐 涉羅爲百濟所幷 二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是爲.
- 三國史記 19권 고구려본기 7, 문자왕13년 하4월조.

상기한 세 기록을 보면, 탐라가 백제에 조공하였다는 최초의 시기는 문주왕 2년인 476년이고, 조공을 중단하다가 동성왕의 친정 소식에 놀라 조공을 재개하는 것은 동성왕 20년인 498년이며, 고구려에서 탐라의 조공을 받지 못한 것은 문자왕 13년인 504년이다. 탐라가 백제에 조공을 개시한 시기로부터 중단된 시기까지는 불과 22년, 그
러니까 20년이 못되어 조공을 중단하다가 22년에 이르러 조공을 재개한 셈이 되는데, 이는 고구려와의 조공관계 때문으로 이해된다. 탐라는 어느 시기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고구려에 조공하기 시작하다가 504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조공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에 조공을 중단한 이유는 동성왕의 탐라 병합 때문으로 보이며, 그 이전까지 백제가 아닌 고구려와 조공관계를 맺으면서 교통한 사실이 인정된다. 탐라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백제를 마다하고 원거리의 고구려에 가옥 따위를 조공한 이유는 탐라의 지배세력 가운데 고구려와 관련한 세력이 존재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탐라가 지리적으로 백제와 가야를 넘어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고 있다가 중단하는 기록이 그 증거이다. 조공을 바친다는 것은 나라간의 우열관계를 인정하는 표지인 만큼 탐라가 백제와 인접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조공하지 않고 고구려에 조공한 이유는 고구려와 탐라의 특별한 관계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  <동국여지승람( 조선 성종 때의 지리서로, 1481년에 50권을 완성)>에 인용된 <고려사 고기(高麗史 古記)>에 의하면 "세 신인이 모홍혈에서 나왔다"고 하며,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의 3신이 양(梁), 고(高), 부(夫) 4씨의 시조로 전해 온다. 이들의 뿌리가 전연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이 신화가 전승된 <고려사 고기>의 '고려'는 고구려를 지칭한 중국측 용례이므로, 탐라 3씨의 연원은 고구려인이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 제주도 <초감제(初感祭)>의 배포도업 가운데 일부분에서도 이런 標識가 등장한다.

우리나라 고구려 신(臣) 베포도업 제이르자. 왕이 나사 국입고, 국이 나 왕입네
다.
- 정주병, 천지왕본풀이.

한반도 남쪽의 섬에서 배포도업을 치는 내용(치국잡기)에 고구려가 강조되는 사실에서 고구려계통의 제주 입도 집단과 탐라 사이에 직·간접적으로 특별한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의 세력이 우월했는지는 단언하기 어려우나 “高爲王, 良爲臣, 夫爲民”이라 하는 ‘초감제’의 내용을 근거로 하면 高氏 계통의 세력이 강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 탐라에는 1세기 경에 고구려계 집단이 입도하여 묘제와 철기를 남겼고, 그런 사정이 있어 원거리의 고구려와 지속적인 교역과 조공무역을 강행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3) 유물 및 유적
▷  용담동 석곽무덤에서 나온 철제 장검 2점이 석곽묘 양식으로, 이 양식은 제주도와 가까운 한반도 남해안 지역의 같은 시기의 묘제양식과 전혀 다르다. 이런 양식은 만주 길림성과 대동강 이북 서북한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한반도 남부 남해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묘제란 가장 보수적이면서 오랜 기간 유지되는 문화적 관습이므로, 매우 멀리 떨어진 고구려와 탐라 사이에 묘제의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은 이 시기에 고구려 출자집단이 탐라에 입도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더욱이, 제주지역에는 청동기문화의 유입 없이 곧바로 철기문화, 그것도 초기철기문화가 아니라 한식철기문화가 유입되었다는 고고학계의 발굴보고가 있다.
▷  제주도 여러 곳에서 발굴된 수혈주거지가 만주·한반도 맥족과 한족의 수혈주거양식과 동일하다.
▷  3을나가 나왔다는 모흥혈(毛興穴)은 고구려의 '수혈', 단군설화의 '동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탐라국 형성 초기 유적유물들이 모두 제주도 북방 해안에 집중된 점도 탐라국 건립 주체세력이 북방으로부터 들어온 고구려족·양맥족·부여족임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3. 제주고씨는 고려시대 이후 정착된 성씨

상기한 2번의 주장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제주고씨는 고구려 왕족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론에 보도된 바처럼 장수왕의 후손만 횡성고씨이며, 제주고씨는 탐라왕국의 후손들로 알려진 것은 잘못된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탐라국이나 고구려나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신용섭 교수는 고·양·부 3성씨의 결합에 의한 탐라국 성립 전설을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고을나는 고구려족 족장, 양을나는 양맥족 족장, 부을나는 부여족 족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탐라국이 고구려와 부여계통의 사람들이 세운 나라라 해도, 탐라의 시조 전승이 형성될 당시에 이미 탐라에 성씨 개념이 확립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탐라에는 고려 시대 전 까지 뚜렷한 성씨가 없었습니다.

그 증거로 1105년에 탐라는 국가가 아닌 고려의 일개 郡으로 편입되었는데, 이 때 탐라에서 고려의 조정에 와서 조공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직위와 더불어 여러 이름이 등장합니다. <고려사>에 제시된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耽羅國 太子 末老(938년)
耽羅國 振尉校尉 夫乙仍(1049년)
耽羅國 王子 殊雲那와 그 아들 古物(1052년)
耽羅國 首領 高漢(1055년)
耽羅星主 高逸(1062)
耽羅星主 懿仁(1092년)
乇羅人 高物(1095년)
乇羅星主(1096년)
乇羅 新星主 陪戎副尉 具代(1101년)
- 冬十二月 耽羅國 太子末老來朝賜星主王子爵. 高麗史 世家 第 2 太祖 21년.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탐라 성주 고한(高漢)과 왕자 수운나(殊雲那), 그리고 손자인 고물(古物)의 3代에서 각각 일정한 성씨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末老 및 懿仁이나 具代 등도 일정한 성씨를 가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이 인정되면 당시 탐라에서는 성씨 개념이 확립되지 않아서 이름에 가까운 한자를 차자표기한 것이 고려사에 인명으로 나타났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52년 탐라 성주 高漢의 손자 古物과 1095년의 탐라인 高物이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는데, 성씨가 古와 高로 통용되고 있어 우리말의 ‘고’音에 가까운 한자를 편의적으로 취했던 것으로 의심됩니다. 당시 고려에서는
高氏가 하나의 姓氏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耽羅의 고한이나 고물, 고일 등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에 있어 高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앞서 고찰하고 추론한 것처럼, 1세기 경에 탐라에 입도한 세력이 고려사 세가편에 등장하는 고한, 고일, 고물 등과 선조와 후손의 관계로 이어진다고 확정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탐라왕의 성씨가 한자음 고(高)가 아니었다는 것에 대한 비슷한 증거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 제주인명에 대한 국내기록은 <삼국사기>가 처음으로서 당시 "탐라가 백제에 조공을 바치고 백제 관직을 제수받았다"는 기사에서 도동음진, 도동음률(徒冬音津,徒冬音律)이란 탐라인명이 보인다. 도(徒)는 뒷날 제주 지배자의 칭호였던 도내(徒內)와 이어지는 말로 보이고 동음(冬音)의 음(音)은 말음첨기 또는 끝소리 덧붙이기라고 부르는 표기로서 백제 지명등에서 보이는 표기이다. 진과 률은 한자음이 서로 닮지 않아 한쪽은 다른 쪽을 잘못 썼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곧 이것은 한 사람에 대한 서로 다른 표기이다.

▷ 중국사서인 <당회요(唐會要)>를 보면 탐라 사신이 찾아온 기록에서 사신의 이름이 유리도라(儒李都羅)라고 적혀 있고 성이 유리요, 이름이 도라라고 풀이하고 있다. 도라라는 이름은 일본서기에도 度羅라는 표기도 나타나며, 국내기록인 고려사에도 豆良같은 비슷한 음의 이두표기가 등장하여 탐라에서 흔한 이름 또는 지배자의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 고려사에도 탐라 인명에 대한 자료가 등장하는데 이두표기된 탐라 인명은 그 때까지도 한화하지 않은 고유 인명임을 알 수 있다. 말로(末老), 주물(周物), 고몰(高沒), 고오노(孤烏弩), 가리(加利), 호잉(號仍), 수운나(殊雲那), 고물(古物) 등이 있으며, 특히 제주 고씨의 시조이며 탐라 설화인 삼성혈 전설에 나오는 고을라의 성인 고(高)가 본디 한자어 기원이 아니라 탐라어를 한자로 적은 취음표기인 듯한 흔적이 보인다. 곧, 고물(古物)과 고물(高沒)에서 古=高 物=沒의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말기와 조선시대에 이르면 점차 이 고는 점차 高란 한자에 잡혀 외자 성씨인 高로 고정화하고(高漢, 高叶) 조선 시대에 이르면 뭍의 인명과 마찬가지로 한화되어 3자 성명으로 바뀐다.

즉,
유리(儒李) 도라(都羅=度羅) = 탐라국 왕의 명칭
고(古=高=孤)
물=몰(勿=沒=物)
인 것입니다.

'제주 고씨'가 하나의 온전한 성씨로 취급된 것은 고려가 탐라를 병합하면서 부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양·부 3성씨의 결합에 의한 탐라국 성립 전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삼을라 시조 전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理誌)>에 실려 있으므로, 1454년입니다. 1번에서 설명한 것처럼, 학자들이 탐라국의 성립 연대를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무려 1000년이 넘는 시간차가 발생합니다. 현존하는 제주 삼을라전승(三乙那傳承)은 성씨 시조 전승의 의미가 강조되어 나타난 후대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탐라의 시조전승에서 고구려와 부여의 성씨를 사용했다고 하는 것인데, 이는 현전하는 삼을라전승의 성격을 논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가령 고을라(高乙那)의 姓을 高라 하여 고구려계 출자 세력이라는 표식으로 읽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삼을라전승이 특별히 부여·고구려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을라전승이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는 고려의 건국 정신을 함께 드러내기 위하여 고구려계 성씨인 高氏와 유사한 음을 지닌 한 세력(고한·고일·고물 등)을 高氏로 확정하고, 성씨인지 분명하지 않은 夫乙仍과 같은 星主의 이름에서 夫氏를 확정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결과적으로 탐라국 본래의 건국신화(서사시)는 성씨시조신화로 격하될 수 있고, 아울러 탐라의 지배 세력들 가운데 고구려의 계통을 잇는 고씨를 성씨로 확정함으로써 고려와 탐라가 하나의 근원에서 시작되었다
고 하는 논리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고려가 역사적으로 이른 시기(1세기경)에 고구려계 출자 집단이 탐라에 입도한 사실을 함께 고려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주지역에서 특별하게 <군웅본풀이>가 전승되는 것도 고려와의 관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다. ‘군웅본풀이’는 구농아방 왕장군이 동해 용왕을 도와 서해 용왕을 없애고, 그 딸인 용녀와 결혼하여 왕근·왕빈·왕사랑의 삼형제를 낳았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 때 등장하는 “구농어멍은 희속에낭”이라 하는 대목에서 ‘희속에낭’은
고려 태조 왕건의 母인 威肅王后와 명칭이 유사하며, 맏아들인 왕근은 고려 태조 王建과 거의 일치합니다. 결국 이 서사시는 고려 왕실의 신화를 무속서사시로 옮겨 노래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제주도에 왕건의 가계와 관련된 중요한 신화를 무속서 사시로 전승하는 이면에는 고대 탐라국의 고려 편입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최종 결론>
  1. 제주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나, 탐라국이 세워진 연대는 문헌상·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정도가 적합합니다. 탐라국의 초대왕인 고을나왕에서부터 14세 영왕까지는 사료적 증거가 부족합니다.
  2. 탐라국은 고구려와 부여 계통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가령 제주도에서 흔히 쓰였던 '을나'라는 족장의 호칭은 부여·양맥·고구려 등 북방에서 이동해온 예·맥족만의 호칭입니다. 따라서, 제주도 토박이 분들은 탐라국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고구려와 부여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3. 탐라국이 고구려와 연관이 깊음에도 불구하고, 제주고씨는 고구려 왕족의 성씨와 관련이 없습니다. 제주고씨의 성씨가 확립된 것은 고려시대 때 부터입니다. 이전까지 탐라국에는 확립된 '성씨'가 없어서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이름을 기록하던 음차표기(借字表記) 방식을 따랐습니다. 가령 고물(古物)과 고물(高沒)을 동일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탐라 성주 고한(高漢)과 왕자 수운나(殊雲那), 그리고 손자인 고물(古物)의 3代 모두 다른 형태의 성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제주 삼을라전승(三乙那傳承)은 성씨 시조 전승의 의미가 강조되어 나타난 후대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