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 선조묘(사우)의 위치를 알려주세요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10-05-23 19:55
조회
1672
[답변]
숭모사(崇慕祠)
제일(祭日) : 5월 5일
숭모사(崇慕祠)대제전은 고씨 중시조인 고말로(髙末老)선조님 이하 13대 선조를 봉양하는 행사로 전국에서 5백여명의 고씨 종친들이 대거 참여하는 전국단위 행사이다.
고씨 관계자는 “조상님께 감사하고 지성으로 공경하는 것은 후손들의 도리이자 의무이다”고 말하고 군산에 사는 고씨 종친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했다.
숭모사(崇慕祠)대제전은 전국에서 고씨 종친들이 오는 만큼 군산을 알리는데도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고 강조했다. 한편 고씨 숭모사(崇慕祠)는 전라북도 군산시 나운2동 관음사 주변에 있다.
-자료출처 : 군산미래신문 발췌-
문경공고조기묘(文敬公髙兆基墓) -제주시 아라동 2464
고려 초기의 문인으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분이다. 공은 고을나의 48세손이며 고려 선종5년(1088)에 태어나 의종11년(1157)에 별세하였다. 초명(初名)은 당유(唐兪), 호는 계림(鷄林)이며, 시호(諡號)는 문경이다. 성주 우복사(右僕射) 유(維)의 아들로 태어나 예종2년(1107)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남쪽 지방에 나가 고을을 다스릴 때는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고, 많은 옛서적을 섭렵하고 역사를 연구하여 깊은 학문을 쌓았다. 한 때는 탐라 성주(星主)로 있다가 인종7년(1129)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조정의 기강을 세우는 데 진력하였다. 인종8년(1130) 하절사(賀節使)로 금나라에 다녀왔고, 이자겸의 무리들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공부원(工部員) 외부에 파천되었으나 얼마 후 옛자리에 온 후 조정의 잘못을 들어 상소를 거듭하므로 공을 예부랑중(禮部郞中)으로 올렸고, 의종3년(1149)정당문학 참지사(政堂文學參知事)가 되었다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까지 올랐다.
공은 고려 조정에 출사(出仕)한 이래 칠순의 노령으로 퇴임할 때까지 오직 충절과 청백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충절을 조정에서 인정하여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이라는 칭호를 주어 그 직위를 높여 주기도 했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시집(詩集)을 3권이나 저술하였다.
묘소는 제주시 아라동 지경 남문 밖 제궁동산에 안장하였는데 제주도내의 묘소 가운데 양식과 형태가 비교적 양호한 묘이며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무덤이다. 묘는 북향이고, 경내에는 묘비와 상석·장군석·동자석·석등 등을 갖추고 주위를 넓게 축장하였다. 묘제일은 매년 삼성 춘계대제 전날인 4월 9일이다.
숭모사(崇慕祠)
제일(祭日) : 5월 5일
숭모사(崇慕祠)대제전은 고씨 중시조인 고말로(髙末老)선조님 이하 13대 선조를 봉양하는 행사로 전국에서 5백여명의 고씨 종친들이 대거 참여하는 전국단위 행사이다.
고씨 관계자는 “조상님께 감사하고 지성으로 공경하는 것은 후손들의 도리이자 의무이다”고 말하고 군산에 사는 고씨 종친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했다.
숭모사(崇慕祠)대제전은 전국에서 고씨 종친들이 오는 만큼 군산을 알리는데도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고 강조했다. 한편 고씨 숭모사(崇慕祠)는 전라북도 군산시 나운2동 관음사 주변에 있다.
-자료출처 : 군산미래신문 발췌-
문경공고조기묘(文敬公髙兆基墓) -제주시 아라동 2464
고려 초기의 문인으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분이다. 공은 고을나의 48세손이며 고려 선종5년(1088)에 태어나 의종11년(1157)에 별세하였다. 초명(初名)은 당유(唐兪), 호는 계림(鷄林)이며, 시호(諡號)는 문경이다. 성주 우복사(右僕射) 유(維)의 아들로 태어나 예종2년(1107)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남쪽 지방에 나가 고을을 다스릴 때는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고, 많은 옛서적을 섭렵하고 역사를 연구하여 깊은 학문을 쌓았다. 한 때는 탐라 성주(星主)로 있다가 인종7년(1129)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조정의 기강을 세우는 데 진력하였다. 인종8년(1130) 하절사(賀節使)로 금나라에 다녀왔고, 이자겸의 무리들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공부원(工部員) 외부에 파천되었으나 얼마 후 옛자리에 온 후 조정의 잘못을 들어 상소를 거듭하므로 공을 예부랑중(禮部郞中)으로 올렸고, 의종3년(1149)정당문학 참지사(政堂文學參知事)가 되었다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까지 올랐다.
공은 고려 조정에 출사(出仕)한 이래 칠순의 노령으로 퇴임할 때까지 오직 충절과 청백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충절을 조정에서 인정하여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이라는 칭호를 주어 그 직위를 높여 주기도 했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시집(詩集)을 3권이나 저술하였다.
묘소는 제주시 아라동 지경 남문 밖 제궁동산에 안장하였는데 제주도내의 묘소 가운데 양식과 형태가 비교적 양호한 묘이며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무덤이다. 묘는 북향이고, 경내에는 묘비와 상석·장군석·동자석·석등 등을 갖추고 주위를 넓게 축장하였다. 묘제일은 매년 삼성 춘계대제 전날인 4월 9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