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항(髙敬恒) 조선 후기의 학자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12:12
조회
41685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의중(義仲).
고경항(髙敬恒)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지만 공부에 전력하여 장창복(張昌復)으로부터 사사받고 김시탁(金時鐸)·허증(許增)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어느 날 깨달은 바가 있어 얼마 되지 않은 땅을 팔고 성거산(聖居山)으로 수도를 하러 들어갔다. 그러나 무리한 학문 연구로 병이 나서 입산한 지 3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 돌아온 지 5년 만에 죽으니, 그의 나이 38세였다.
고경항은 단신의 체구로 왜소했지만, 엄준한 자세를 유지하며 기품이 당당하였다. 그는 특히 역사에 관심을 가져 상당한 조예를 이루었다.
그가 죽자 김헌기(金憲基)가 묘지명을 쓰고 최순성(崔舜星)이 묘표를 지었다. 용음사(龍陰祠)에 제향되었다.
고경항(髙敬恒)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지만 공부에 전력하여 장창복(張昌復)으로부터 사사받고 김시탁(金時鐸)·허증(許增)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어느 날 깨달은 바가 있어 얼마 되지 않은 땅을 팔고 성거산(聖居山)으로 수도를 하러 들어갔다. 그러나 무리한 학문 연구로 병이 나서 입산한 지 3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 돌아온 지 5년 만에 죽으니, 그의 나이 38세였다.
고경항은 단신의 체구로 왜소했지만, 엄준한 자세를 유지하며 기품이 당당하였다. 그는 특히 역사에 관심을 가져 상당한 조예를 이루었다.
그가 죽자 김헌기(金憲基)가 묘지명을 쓰고 최순성(崔舜星)이 묘표를 지었다. 용음사(龍陰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