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환(髙鎭煥) 3.1운동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12:31
조회
42171
1894. 7 12~1925. 2 25
출신지 : 경기 抱川,
활동지 : 경기 抱川
[중시조의 33세손, 영곡공(靈谷公) 득종(得宗)의 19세손, 判書公(台弼)의 18세손, 父(永遠)]
나라의 장래는 인재양성에 있다고 생각한 공은 많은 사재(私財)를 출연하여 고향 마을에 한학서당(漢學書堂)을 설립하였다.
공은 제자들을직접 가르치면서 민족사상과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은 동지를 규합하고 학생들을 동원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참여하였으며 이를 막는 왜경에게 맨주먹으로 항거하다가 피체(체포)되었다.
경찰서로 연행된 공은 모진 고문을 받고 6개월후 불구의몸으로 출감하여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으나 옥고의 후유증으로27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하였다.
한편 공이 전재산을 교육사업에 다 바치고 독립운동으로 순국하자 가족들은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온갖 고생을 다 하였다.
아들 인태(仁泰)는 고아로 떠돌다가 다행히 미국인 선교사 마우리 박사의 도움으로 중국 상해(上海)에서거주하다가 1945년 8. 15광복으로 귀국하였다.
경기도 포천군민들은 공의 공훈을 추모하여 1971년 4월 기념비를 세웠다.
출신지 : 경기 抱川,
활동지 : 경기 抱川
[중시조의 33세손, 영곡공(靈谷公) 득종(得宗)의 19세손, 判書公(台弼)의 18세손, 父(永遠)]
나라의 장래는 인재양성에 있다고 생각한 공은 많은 사재(私財)를 출연하여 고향 마을에 한학서당(漢學書堂)을 설립하였다.
공은 제자들을직접 가르치면서 민족사상과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은 동지를 규합하고 학생들을 동원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참여하였으며 이를 막는 왜경에게 맨주먹으로 항거하다가 피체(체포)되었다.
경찰서로 연행된 공은 모진 고문을 받고 6개월후 불구의몸으로 출감하여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으나 옥고의 후유증으로27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하였다.
한편 공이 전재산을 교육사업에 다 바치고 독립운동으로 순국하자 가족들은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온갖 고생을 다 하였다.
아들 인태(仁泰)는 고아로 떠돌다가 다행히 미국인 선교사 마우리 박사의 도움으로 중국 상해(上海)에서거주하다가 1945년 8. 15광복으로 귀국하였다.
경기도 포천군민들은 공의 공훈을 추모하여 1971년 4월 기념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