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봉(髙廷鳳)의『수촌집(水村集)』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0-12-28 15:37
조회
44065
髙廷鳳의 자는 鳴國이요, 호는 水村, 부친 髙暎과 모친 서산김씨 麒瑞의 딸 사이에서 1745년에 태어났다. 모친이 태몽에서 상서롭게 떠오르는 해를 안는 꿈을 꾸어 어려서의 이름은 ‘捧日’이라고 불렸다.
고정봉의 집안은 역대로 변란이 있을 때 나라에 충성을 다한 인물이 다수 출현했었다. 가령, 6대조인 髙敬命은 임란 때 의병장으로서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5대조 髙從厚는 부친인 고경명과 동생 髙因厚가 순절하자 復讐義兵將이라 칭하고 진주성에서 金千鎰 등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그런데 고정봉의 부친 때에 이르자 집안의 이러한 명성과는 달리 선조의 위업이 점차 쇠해지고 있었는데, 따라서 고정봉에게 건 기대가 남달랐다. 이로써 고정봉은 주변의 뜻에 부응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집안은 비록 쇠미하나 형제간의 우의는 돈독하였고, 지조는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고정봉의 나이 55세 무렵(1797년)에 정조는 직접 교정한 眞西山의 『대학연의』와 邱瓊山의 『대학연의보』초본을 광주에 보내어 고증과 정정을 하도록 했는데, 고정봉의 것이 가장 나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고경명의 후예라 하여 특별 우대 조치를 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라도사라는 벼슬을 하사받게 되었고, 3년이 지난 다음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비인현감 등을 역임하는데, 선정을 베풀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髙廷鳳의 개인 문집.=
『수촌집』은 단편적이나마 조선후기 호남 문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고경명의 후손인 고정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정조와 연관이 있어서 주목을 받을 만하고, 문학적으로 다수의 시문의 성격을 밝히는 작업도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호남에 존재했던 폐단 일곱 가지는 역사 쪽에서 관심을 가져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내용 및 특징]
『水村集』은 목활자본 7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에는 시문이, 권2에는 書ㆍ家狀ㆍ遺墨書 등이, 권3에는 疏ㆍ賦ㆍ詩義 등이, 권4에는 序ㆍ記ㆍ跋ㆍ說ㆍ銘ㆍ賦ㆍ辭가, 권5에는 雜著ㆍ附錄ㆍ書가, 권6~7까지는 경서에 대한 글이 각각 실려져 있다.
권1 시문의 경우, 총 300여 수정도 되는데, 고시나 절구보다는 율시를 즐겨 사용하였다. 또한 내용을 보면, 산수 자연을 읊은 것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그 중에 특별히 현실주의적인 시문도 있다. 그 구체적인 예를 들면, 「良苽亭打麥」이나 「麥隴待雨」 등인데, 이들 시문은 당시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려내고 있다. 한편, 「綱常」이나 「觀物遺感」 등의 시문에서는 도학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어 고정봉의 시문이 다양한 내용 층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권2의 서는 총 18편정도 되는데, 아우 景立에게 보낸 것이 8편, 從弟 汝敬에게 보낸 것이 4편, 사종형 承旨에게 보낸 것이 각각 2편 등등이다. 가장의 내용은 선조의 행장을 담은 것으로 5대조로부터 시작하여 先考妣까지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유묵서는 고정봉의 생전 유묵을 보여준 것으로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필치를 알려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권3의 「辭灜選承召仍兼陳捄弊疏」는 고정봉의 나이 71세 무렵에 올린 상소문으로 당시의 여러 폐단을 지적하여 그러한 폐단이 고쳐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특히, 글 가운데 ‘나라의 폐단은 곧 내 몸의 병이다.’라고 하여 고정봉 자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었다. 책으로는 당시 호남의 일곱 가지 폐단을 물어와 대답을 한 내용이 있는데, 고정봉은 일곱 가지 폐단으로서 結役ㆍ糶糴ㆍ均稅ㆍ漕轉ㆍ軍政ㆍ關防ㆍ法令 등을 들었다.
권4에는 서문, 기문, 발문 등 다양한 문장들을 모아놓았는데, 이 가운데 특히 기문의 「管城子記」와 「楮先生記」 등은 붓과 종이를 소재 삼은 것으로 우의적인 특성이 드러나는 글이다. 또한 설 가운데 「百結先生三變說」은 당시 동쪽 이웃에 사는 백결선생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름대로의 논리를 편 글이다.
권5에는 21편의 잡저와 哀辭, 祝文, 告辭 등의 글이 실려 있다. 그 다음에 부록으로서 시문과 書 등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는 흔히 보는 문집의 체제와는 다르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마지막 권6에서 7까지는 나름대로 정리한 경서의 내용을 실었는데, 고정봉의 경학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또한 7권의 후미에 「經義條對儒生錄」, 「庚申榜目」, 「己巳館錄」, 「壬申堂錄」등을 실었는데, 정조의 경서에 대한 물음에 함께 참여했던 인물들이나 과거시험 등에 함께 합격한 명단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에 간행한 『수촌집』은 鄭寅普, 尹寗求, 髙光善 등이 서문을 남겼다.
[자료적 가치]
『수촌집』은 단편적이나마 조선후기 호남 문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고경명의 후손인 고정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정조와 연관이 있어서 주목을 받을 만하고, 문학적으로 다수의 시문의 성격을 밝히는 작업도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호남에 존재했던 폐단 일곱 가지는 역사 쪽에서 관심을 가져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자료출처 : 한국학자료포털-
고정봉의 집안은 역대로 변란이 있을 때 나라에 충성을 다한 인물이 다수 출현했었다. 가령, 6대조인 髙敬命은 임란 때 의병장으로서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5대조 髙從厚는 부친인 고경명과 동생 髙因厚가 순절하자 復讐義兵將이라 칭하고 진주성에서 金千鎰 등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그런데 고정봉의 부친 때에 이르자 집안의 이러한 명성과는 달리 선조의 위업이 점차 쇠해지고 있었는데, 따라서 고정봉에게 건 기대가 남달랐다. 이로써 고정봉은 주변의 뜻에 부응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집안은 비록 쇠미하나 형제간의 우의는 돈독하였고, 지조는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고정봉의 나이 55세 무렵(1797년)에 정조는 직접 교정한 眞西山의 『대학연의』와 邱瓊山의 『대학연의보』초본을 광주에 보내어 고증과 정정을 하도록 했는데, 고정봉의 것이 가장 나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고경명의 후예라 하여 특별 우대 조치를 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라도사라는 벼슬을 하사받게 되었고, 3년이 지난 다음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비인현감 등을 역임하는데, 선정을 베풀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髙廷鳳의 개인 문집.=
『수촌집』은 단편적이나마 조선후기 호남 문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고경명의 후손인 고정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정조와 연관이 있어서 주목을 받을 만하고, 문학적으로 다수의 시문의 성격을 밝히는 작업도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호남에 존재했던 폐단 일곱 가지는 역사 쪽에서 관심을 가져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내용 및 특징]
『水村集』은 목활자본 7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에는 시문이, 권2에는 書ㆍ家狀ㆍ遺墨書 등이, 권3에는 疏ㆍ賦ㆍ詩義 등이, 권4에는 序ㆍ記ㆍ跋ㆍ說ㆍ銘ㆍ賦ㆍ辭가, 권5에는 雜著ㆍ附錄ㆍ書가, 권6~7까지는 경서에 대한 글이 각각 실려져 있다.
권1 시문의 경우, 총 300여 수정도 되는데, 고시나 절구보다는 율시를 즐겨 사용하였다. 또한 내용을 보면, 산수 자연을 읊은 것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그 중에 특별히 현실주의적인 시문도 있다. 그 구체적인 예를 들면, 「良苽亭打麥」이나 「麥隴待雨」 등인데, 이들 시문은 당시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려내고 있다. 한편, 「綱常」이나 「觀物遺感」 등의 시문에서는 도학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어 고정봉의 시문이 다양한 내용 층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권2의 서는 총 18편정도 되는데, 아우 景立에게 보낸 것이 8편, 從弟 汝敬에게 보낸 것이 4편, 사종형 承旨에게 보낸 것이 각각 2편 등등이다. 가장의 내용은 선조의 행장을 담은 것으로 5대조로부터 시작하여 先考妣까지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유묵서는 고정봉의 생전 유묵을 보여준 것으로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필치를 알려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권3의 「辭灜選承召仍兼陳捄弊疏」는 고정봉의 나이 71세 무렵에 올린 상소문으로 당시의 여러 폐단을 지적하여 그러한 폐단이 고쳐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특히, 글 가운데 ‘나라의 폐단은 곧 내 몸의 병이다.’라고 하여 고정봉 자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었다. 책으로는 당시 호남의 일곱 가지 폐단을 물어와 대답을 한 내용이 있는데, 고정봉은 일곱 가지 폐단으로서 結役ㆍ糶糴ㆍ均稅ㆍ漕轉ㆍ軍政ㆍ關防ㆍ法令 등을 들었다.
권4에는 서문, 기문, 발문 등 다양한 문장들을 모아놓았는데, 이 가운데 특히 기문의 「管城子記」와 「楮先生記」 등은 붓과 종이를 소재 삼은 것으로 우의적인 특성이 드러나는 글이다. 또한 설 가운데 「百結先生三變說」은 당시 동쪽 이웃에 사는 백결선생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름대로의 논리를 편 글이다.
권5에는 21편의 잡저와 哀辭, 祝文, 告辭 등의 글이 실려 있다. 그 다음에 부록으로서 시문과 書 등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는 흔히 보는 문집의 체제와는 다르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마지막 권6에서 7까지는 나름대로 정리한 경서의 내용을 실었는데, 고정봉의 경학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또한 7권의 후미에 「經義條對儒生錄」, 「庚申榜目」, 「己巳館錄」, 「壬申堂錄」등을 실었는데, 정조의 경서에 대한 물음에 함께 참여했던 인물들이나 과거시험 등에 함께 합격한 명단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에 간행한 『수촌집』은 鄭寅普, 尹寗求, 髙光善 등이 서문을 남겼다.
[자료적 가치]
『수촌집』은 단편적이나마 조선후기 호남 문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고경명의 후손인 고정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정조와 연관이 있어서 주목을 받을 만하고, 문학적으로 다수의 시문의 성격을 밝히는 작업도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호남에 존재했던 폐단 일곱 가지는 역사 쪽에서 관심을 가져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자료출처 : 한국학자료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