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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 탐라이야기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0-02-11 19:47
조회
5884
‘깊고 먼 바다의 섬나라’ 라는 이름을 가진 천년왕국 탐라가 부활하고 있다.

1. 천년왕국, 탐라 이야기

고대 제주는 탐모라, 섭모라, 섭라, 담라, 탁라, 영주 등으로 불리웠다. 이들 명칭은 섬나라라는 뜻인데.. 이곳에 천년왕국, 탐라가 있었다. '깊고 먼 바다의 섬나라' 라는 뜻을 지닌 탐라는 제주땅에 신화처럼 존재했던 고대왕국이었다.

탐라국이란 명칭의 실제적 유래는 고려사 지리지에 기인한다. "제주도 3성(姓) 시조신의 하나인 고을나의 15세손 고후, 고청과 그 아우 등 3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에 이르렀는데, 이때는 신라 성시였다. 3형제가 들어와 조공하자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맏아들에게는 성주, 둘째에게는 왕자, 막내에게는 도내라는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에서 탐라국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탐라라는 명칭 대신 탐라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의 최초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주호다. "주호(州胡)라는 지역이 있는데 마한의 서해 중 대도상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배를 타고 중국과 왕래하며 교역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씨, 양씨, 부씨 성을 가진 세 성인이 삼성혈의 세 구멍에서 솟아 나와 세웠다는 탐라국. 기원을 전후하여 건국되었다고 전해지는 탐라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는 독자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어왔으며 그 후 고려시대까지도 탐라국만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1105년 고려 숙종때 고려에 영속,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인 탐라군으로 바뀌면서 고대왕국 탐라의 역사는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이어 고종때인 1214년 탐라군은 제주라는 이름을 얻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탐라국, 제주땅에 사람이 발자취가 새겨진 것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오래된 역사의 증거가 북제주군 애월읍 곽지리에 위치한 곽지패총 유적이다. 패총이란 옛날 사람들이 바다에서 조개 등을 채집, 먹고 버린 지금의 쓰레기장인 셈이다.

약 10,000평 규모의 이 패총의 가장 밑바닥에는 청동기시대의 공렬토기부터 층차적으로 삼국시대 토기, 고려, 조선의 각종 도자기 등이 출토되어 오랜기간 이 지역이 탐라의 터전이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이 패총에서는 탐라시대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토기인 ‘곽지리식토기’가 발굴되었다.

‘곽지리식 토기’는 기원후부터 500년까지의 탐라전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애월읍 곽지리를 비롯해 용담동, 대정읍, 안덕면 등 도내 곳곳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 토기는 태토가 굵어 대형 용기를 제작하는데 용이했고 그릇도 매우 두껍다.

만드는 방법도 육지부 토기는 점토를 가락처럼 만들 어 나선형으로 붙이는 권상법을 이용한데 반해 곽지리식 토기는 바닥에서 동체로 차근차근 쌓아 올려 빚는 ‘적륜법’으로 그릇을 만들었다. 때문에 이음새나 바닥이 투박하다. 그러나 토기에는 실생활의 편리를 위한 실용성과 소박한 아름다움이 베어 있어 당대 탐라인들의 문화양식을 엿볼 수 있다.

곽지리에 위치한 곽지리패총.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탐라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 중 주목할 만한 것이 있는데 말뼈들이다. 이 말뼈는 분석결과 3세기경 1미터 20센티미터 가량 말뼈들의 작은 말로 밝혀졌다.(확인요)

이 말은 고구려와 동예가 그 특산지로 말이 신라와 백제가 건국될 당시 이들 나라에 전파된 것처럼 같은 시기에 탐라에도 말이 유입됐을 것으로 본다.

이 제주마는 부여 및 고구려때부터 사육돼왔으며 기록상으로는 1073년과 1258년에 탐라에서 고려에 제주마를 진상한 사실이 있으며, 1273년에 원나라가 탐라를 침공한 뒤 약 100년간 몽골말이 유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주마는 한반도의 여느 나라 못지않게 탐라에도 북방의 문화가 꽃피웠음을 알려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제주시 용담동에 위치하고 있는 '월성마을‘ 1984년 이곳에서는 석곽묘와 옹관묘로 구성된 복합분묘유적이 발굴되었다 석관묘 4기와 합구식, 단옹식 등 6기의 옹관묘가 확인되었는데 전체적으로는 중심부에 석곽묘가 위치하고 가장자리에 옹관묘가 배치되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북쪽의 석곽묘와 그 주변에서는 장검 2점, 단검 1점, 철모 등 다량의 철기가 발굴되었다. 이 출토 철기유물은 기원후 2세기경 영남지역 고분 출토품과 유사하며 특히 칼의 경우는 실제 사용 검이 아니라 위세용 칼로 여겨진다.

철생산지가 한군데도 없는 탐라에서 철기는 외부로부터 수입해야하는 중요 품목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철제 유물이 부장된 용담동 고분은 국의 수장급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사람의 무덤일 것이다. 부장품 규모는 대체로 비슷한 시기의 남한지역 목관묘 혹은 목곽묘 중에서 상위급 수준이다.

이처럼 철의 발견은 2세기 무렵 탐라국이 대외문물 교류를 통해 선진화된 철기 문명을 꽃피웠음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 탐라국은 해로를 통해 문물을 유입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는 탐라국이 독자적이고도 활발한 해상활동을 펼쳤음을 증명하고 있다.

3. 탐라 중기 문화(삼국시대&통일신라)

선사시대를 거쳐 중기시대로 접어든 탐라국. 이때의 한반도 정세는 삼국시대 후기와 통일신라 시대에 해당된다.

탐라는 5-7세기에는 백제와 그리고 7세기 중엽이후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통일신라와 관계를 맺고 일본은 물론 당에까지 사신을 파견하기에 이르는데....

이 시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탐라국의 유적으로는 애월읍 고내리 유적이 있다. 해안에서 700m정도 떨어진 평탄대지에 위치한 이 유적은 약 10,000여평 규모. 발굴결과 100여개의 크고 작은 구덩이가 밀집되어 있는데 이는 토기제작과 관련하여 야외요지, 점 ,토채굴, 소토폐기로 사용되었거나 토기나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지하창고로 추정한다.

고내리유적 출토유물의 대부분은 단순한 기형의 적갈색 심발형토기가 다량으로 확인되었는데 이를 일명 ‘고내리식토기’라 부른다.

아가리 보다 밑이 넓고 어깨가 통통한 것이 특징인 고내리식토기는 남한지방에서 회색도기(A.D.5~8세기)가 성행하고 적갈색 토기가 소멸할 때 나타난 제주의 대표적 유물이다. 이 토기는 탐라국시대 대외 교류가 가장 활발한 시기, 탐라중기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또 제주도 개량형 무문토기가 최고의 단계로 제작될 때 만들어진 토기로 기물(器物) 가운데 최고 기술로 제작, 전대의 곽지식 토기보다 분명 세련됐고 안정된 문화를 기반으로 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탐라중기의 유적으로는 용담동 해안가 언덕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해안에서 300여m 거리에 위치하며, 탁트인 바다와 ‘동한드기’벌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출토된 그릇은 모두 통일신라토기로 병과 항아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문양은 시문수법에 따라 그은 무늬와 찍은 무늬, 두드림 무늬, 돌대무늬로 나누어진다.

장경병, 사각편병 등의 토기류와 화살촉?도자?과 대 등의 철제품, 각종 유리구슬과 중국산 도자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회색도기군은 경주 안압지와 전 남 영암 구림리 가마터에서 출토되는 통일신라 도기 들과 유사하다. 이는 당시 한반도와 중국과 문물교 류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따르면 이 유적은 제주 앞 해안이 훤히 조망되는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고, 제기로 많이 쓰이는 장경병 등의 병류와 항아리만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의례와 관련된 제사유적으로 추정된다. 또한 ‘삼국사기’ ‘일본서기’등 문헌에 나타나는 탐라국의 활발한 조공외교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나라의 중대사가 있어 배를 떠나 보낼때마다 항해의 안녕을 비는 제사 행위가 이곳에서 있었음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증거인 것이다. 탐라국은 한반도의 부속된 지방이 아니라 한반도는 물론 중국, 일본, 동남아 등과 대등한 외교관계 및 교역을 맺었던 독립국이었다. 탐라시대 제주도는 해양 한가운데 위치한 절해고도가 아니라 고대 동북 아 해상교류의 거점지역이었던 것이다.

이미 3세기말 동이전에서는 탐라가 삼한과 교역했다 는 기록이 있으며 제주시 산지항에서 A.D. 1세기경의 중국화폐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대 탐라국은 활발한 해상무역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문헌기록에 나타난 탐라의 대외교류는 조공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문주왕 2년에 탐라에서 백제에 조공했으며 이것은 백제 멸망때까지 지속되었다고 전한다.

탐라국은 661년부터 688년까지는 일본과 교류했다. 신라와의 교류는 문무왕 2년부터 시작되었으며 8세기 이후에는 신라와 조공관계를 맺게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개성과 교류하는데 고려사에 의하면 덕종 3년 11월 팔관회때 탐라에서 토산물을 진상한 기록이 있고, 지속적인 팔관회 참석으로 문물을 교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탐라의 주요 생산물은 가와 전복 등 어패류와 귤, 우황 등 해산물과 농, 축산물이 대부분이었다.

고구려에는 가를, 일본에는 탐라복 즉 전복과 탐라방보를 고려에는 귤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탐라의 주요 수입품은 철제 생활도구, 구리 제품, 도자기, 쌀, 소금, 약재, 비단 등 탐라에서 생산되지 않거나 희귀한 물품이었다. 이처럼 탐라가 당대의 해상교역국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 있다.

신창리 해저유적이다. 이 유적은 북제주군 한경면 신창리 해역에 위치 해녀들이 금사, 금팔찌 등 금제장신구와 도자기편을 신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남송때의 도자기 일부와 녹갈색, 갈색 유약이 시유된 청자대접 편들이다.

음각으로 장식된 화초와 구름무늬가 시문되어 있으며 대접 안쪽바닥에 ‘하빈유범’ ‘금옥만당’ 등의 명문인장이 찍혀있다.

이 도자기는 중국 절강성의 용천요에서 생산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대접무늬는 중국 복건성 동안요의 대접과도 유사하다. 이 유물들은 남송때 중국의 절강성이나 복건성 지역에서 일본 큐슈나 제주도를 기착지로하여 해상통행하던 선박이 도중에 침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 또 하나의 독립국가를 이루었던 탐라국은 위의지도에서 고려 숙종 10년 서기 1105년에 고려의 지방행적구역 제주도로 줌인 들어가고 탐라군으로 속하게 된다.

그러나 성주, 왕자의 작위는 그대로 존속되어 실질적인 탐라의 통치자 역할을 했다. 한편 고려 왕조는 ‘원’의 침략을 받아 항거가 일어나고 삼별초가 제주를 최후의 거점으로 삼아 대몽항전을 전개하게 된다. 하지만 여몽연합군에 의해 정벌된 후 제주도는 몽고에 예속되어 이후 약 100년간 직할통치함으로써 외국의 통치를 받는 쓰라린 역사를 겪게 된다.

그 후 탐라의 상징이었던 성주와 왕자는 1402년 조선왕조에 입조함으로써 탐라는 그 자취마저 역사속으로 흩어지고 만다. 천년왕국 탐라는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제주땅 곳곳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들은 한반도의 깊고 먼 바다의 섬나라, 그곳에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