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민(髙傅敏)선생과「송학세고(松鶴世稿)」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0-02-11 19:44
조회
5275
고부민(髙傅敏)선생과「송학세고(松鶴世稿)」
1.작자 약전(略傳)
고부민(髙傅敏, 1577-1642)은 자는 무숙(務叔), 호는 탄음(灘陰)으로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죽촌 고성후인데, 고성후는 종숙부인 충열공 제봉 고경명에게서 수업하였고, 인물됨이 훌륭하고 영리해서 제봉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제봉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는 제봉을 도와 군공(軍功)을 세웠다. 그는 그 공으로 익산군수를 제수받기도 했는데, 제봉이 죽자(1592), 이듬해에는 권율의 막하로 가서 행주싸움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탄음 고부민은 강수은에게서 글을 배워서 일찍이 유학과 문예를 크게 성취했다. 그는 인조5년(1672),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제인 고부필과 삼종 고부립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탄음은 "금산의 순절과 진주성의 함몰은 비록 시변이라고는 하나, 그 국치를 아직 잊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는데, 지금 북쪽 오랑캐가 다시 창궐하여 이 땅에 이르니, 이 나라 신하와 백성이 된 사람들은 마땅히 몸을 살피지 않고 적개심에 불타고 있다. 나는 마땅히 진주성과 금산에서의 억울함을 잊지 못하는 병사들을 모아, 오랑캐를 무찌르다가 죽어 천하에 대의를 밝혀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으리라" 하고 의병을 모으기에 앞장섰다.
이때, 탄음 고부민의 재종숙인 정헌공 고순후가 김장생의 추천을 받아 호남의병장이 되었는데, 탄음은 동지 수십명과 그 막부에 이르러 의병과 군량을 모으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기세를 얻어 북으로 행하던 중, 완산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되고 적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통한을 머금고 물러나 두문불출했다.
또, 병자호란때에도 탄음은 동지 오천여명을 규합하고 군량을 모아 서울로 향하던 중, 청주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하늘의 강기가 해와 달을 떨어뜨리고, 시절의 뜻이 역사를 말살시키는가 (天綱墜日月 時義掃春秋)"라는 시를 짓고 자연에 묻혀서 일생을 마쳤다.
탄음 고부민은 방손인 고공진은 탄음의 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부민 선생은 호란이 강화를 하게 되어 공훈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 의열은 충분히 기에 새기어 찬사할 만하다. 그 근원으로 말하면 사계의 학문을 바로 배워 정자와 주자를 쫓았고, 가정으로 말하면, 죽촌공의 문장과 행업을 백세에 떨칠 만하고 집안으로 말하면, 충열공의 충성심과 의정이 천고에 빛나니, 고부민 같은 사람은 그 충열을 이어 후통을 빛낸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탄음 고부민은 충절이나 덕망 학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될 만했다. 그는 스승의 학설을 연구하고 펴서, 크게는 천인과 성명(性命)을 궁구하고, 작게는 아주 미세한 사물도 분석하였을 뿐 아니라, 문장에 이르러서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체제를 갖추고 있어서, 그 이전의 다른 사람들의 진부한 말을 답습하지 아니 하였다. 또 그의 마음가짐에 있어서도 이해를 쫓아 움직이지 아니 하였고, 몸가짐에 있어서도 항상 삼가하여 모난 행동을 하는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는 온화한 얼굴로 접했고, 가사를 돌볼 때도 조정에서의 일처럼 질서를 두어 하곤 했다고 한다.
2.한시문 개관(槪觀)
「송학세고」는 탄음 고부민과 그의 아들 고두경의 문집이다.
원래는 이 두사람의 문집이 각각 따로 있었을 것이나, 전하면서 많이 산실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해방 후에 그 후손들이 고부민, 고두경 부자의 글들을 함께 모아 합철 편집한 것이 「송학세고」이다.
「송학세고」라고 한 것은 탄음의 조상들이 이조 초기부터 광주로 자리를 옮겨온 이래 대대로 송학산 기슭에서 살았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송학세고」1권인, 고부민의 문집에 시 97수, 제문과 기타 부록이 실려 있다. 제문은 강수은선생에 대한 것이고 부록에는 정묘강노입구시기사, 의병장차첩, 의거사실교문, 격문, 행장 등이 대부분이다.
탄음 고부민은 수은 강항에게서 학문을 배워 문사를 크게 이루었고, 또 사계 김장생에게서 성경을 익혀 심취한 바 컸다. 「송학세고」서문에는 "탄음의 시문이 이미 거의 산일되어 없어지고, 오직 시고일권만 전하는데, 척회지음이 큰 감명을 준다" 고 쓰고 있다. 척화지음이란 <문남한강성>이라는 시를 말하는데 종묘사직의 기강이 무너져내리는 데 대한 통한과 울분을 그리고 있는 시다.
또 <강수은선생만>이라는 시도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수은 강항은 탄음 고부민의 스승이자 의병장 이다. 그는 영광 출신으로 선조29년(1596) 공조 형조좌랑을 지냈고, 선조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조판서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남원에서 군량 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당한 뒤, 영광으로 도라가 의병 활동을 하다. 전세가 분리해지자 당시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기 위해 남쪽으로 가다가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학식이 높았기 때문에 일본 오오사카에서 학식높은 중들과 교유하며 유학을 가르쳐 주고, 그곳의 지리와 군사 등 적정 형편을 인편으로 고국에 보고 했다. 그리고 선조33년(1600) 포로에서 풀려 고국에 돌아와 선조35년 대구교수 등의 벼슬에 임명 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자처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시<강수은선생만>은 강항선생의 충절과, 나라에 크게 쓰일만한 재능을 가지고도 평범한 일생을 보냈던 선비의 담백한 삶의 모습을 그리면서, 사제지간으로서의 애틋한 정을 표현한 오언배율의 긴 시 이다.
탄음 고부민은 유평과도 가까이 지냈던 모양이다. 유평은 자는 화보, 호는 송암인데 인조때 의병활동을 했던 사람이니, 그런 이유로 뜻이 통해 가까이 했던 모양이다. 그의 시에는 유평에 대한 시가 여러편 보이는데 <영송암정송>, <증유송암>, <송암이서래문감성절구2수>등 11수나 된다. 그중에서도 <영송암정송>은 칠언율시로 송암 유평의 뜰에 있는 소나무의 헌걸찬 모습을 그리면서 송암이라는 유평의 호와 의병 활동을 했던 그들의 기상을 의미있게 암시하면서 시상을 전개해나가고 있는데, 가히 빼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깝게도 경연에 한 자가 탈락되어 있다.
이상의 작품들이 대개 그가 의병 활동에 뜻을 두었다거나, 의병장 집안의 후예로서의 일면을 보여준 시들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시편들은 주로 그의 일상 생활의 감회를 읊은 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민우>는 장마철에 농민들의 번민을 읊고 있다. 이 시는 물에 논밭이 잠기고 곡식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며, 어린애들의 다툼과 식구의 질병들에 마음을 쓰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3.한시문 발췌 번역(拔萃飜譯)
次善養亭韻 선양정 시운에 따라
占斷幽棲志 늘 그윽한 곳에서 살기를 바랬더니,
誅茅始卜居 비로소 띠풀 베어 초가집 얽었네.
耕雲巢父趣* 구름과 마음을 같이 하여 소부의 뜻을 쫓고,
釣月子陵?** 달을 벗하며 자릉의 뒤를 쫓네.
濯足溪邊石 개울가 돌에 앉아 발을 씻고,
開襟松下盧 소나무 아래 정자에서 옷섶을 여네.
亭名善養意 정자의 이르이 뜻을 좋게 키운다 했으니,
應不在樵漁 마땅히 나무하고 고기낚는 데는 마음을 두지 않노라.
▒ 상세설명
*소부(巢父) ; 요임금 때의 은사로 요임금이 천하를 맡기고자하여도 받지 않고 숨어 삼.
*자릉(子陵) ; 후한때 엄광을 말함. 어렸을 때 광무와 같이 공부를 하였는데, 광무가 임금이 되자 성명을 바꾸고 숨어 지냄.
姜睡隱先生換* 강수은 선생의 별세에 부쳐
我愛姜夫子 내 강수은 선생을 사모하노니,
能傳不朽名 능히 불후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리.
文章元小技 문장은 원래 잔 재주이고,
節義本忠貞 절의는 본래 올곧은 정성인 것을,
爲國身何惜 나라를 위하는 데 어찌 몸을 아끼리?
臨危命亦輕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목숨 또한 가벼이 여겼네.
一封肝血字 편지에 담긴 정성스런 글은,
萬里戀君誠 만리타국에서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스런 마음.
完璧誰無感**인상여의 화씨벽에 누가 감격하지 않으리.
知人世不明 어진 사람을 세상이 분별하지 못할 뿐이었네.
車空老驥 준마같은 노신, 헛되이 소금 수레나 끌다가,
谷口竟歸耕 마침내 산촌으로 돌아와 농사나 짓고 살았네.
心事遵先哲 마음은 옛날 어진 사람들을 쫓으며,
生涯混野珉 일생을 농사꾼들과 함께 했도다.
百年嗟易暮 아! 인생백년이 이리 쉽게 저무는가?
五鼎未終榮 벼슬길에서는 끝내 영화 한번 못 구했네.
牢落吾安放 나의 적막한 마음을 어찌 할거나?
嗚呼奠兩楹 아아! 대청 기둥 사이에 빈소를 정했네.
德尊年不稱 덕은 높아 해를 두고도 일컬을 수 없는데,
天意杳難評 하늘의 뜻은 묘연해 헤아리기 어렵구나.
師友兼姻 존장들이나 동지들, 사돈과 동서들도,
傷心等弟兄 슬퍼하기를 형제를 잃은 것 같이 하네.
不堪埋白璧 차마 시신을 묻을 수 없어,
揮淚向佳城 눈물을 흘리며 묘지를 향하네.
▒ 상세설명
* 강수은 ; 강항(1567-1618) 학자, 의병장, 자 태조, 호는 수은, 영광출신, 정유왜란 때 남원에서 군량 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되자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학식높은 중들과 교유하며 그들에게 유학을 가르쳐주고, 적정을 고국에 알려줌.
*완벽 ; 흠이 없는 구슬이라는 뜻이나, 중국 전국시대 때 조나라 신하인 상여가 진나라 소양왕이 자기의 열다섯 성과 조나라의 화씨지벽과 바꾸자고 하였을 때, 소양완의 간계를 간파하고 사신으로 가서 구슬을 보존하여 오므로 해서, 훌륭한 신하와 관련해서 쓰이는 말이다.
幽居述懷 숨어지내는 감회를 읊음
誅茅新卜博山陽 띠풀 베어 박산의 양지쪽에 초가집 엮으니
瑞石層峰看渺茫 서석산 봉우리들이 아련히 떠오르네.
屈曲前川如有護 굽이굽이 흐르는 앞 냇물이 감싸주는 것 같고
蕭條村落不成行 적막한 시골이라 나들이에 마음쓸 일 없네.
窮居自任蓬高下 궁벽한 곳, 초가집에 자신을 내맡기고 추려
序 何 藜藿場 어찌 거친 쌀에, 명아주, 콩잎 밥상을 꺼리겠는가?
春夢幾驚鷄報曉 새벽 닭 울음소리에 봄잠 몇번이나 깨었고
秋懷頻見雁呼想 기러기 불음소리에 가을의 회포 몇번이나 느꼈는가?
徒傷老大知無奈 다만 늙어감을 어찌할 수 없어 슬퍼하며
苦戀明時念不忘 살기 좋은 때를 깊이 바라, 마음속에 잊지 못하고
這裡難堪多少恨 그속에 많은 한 감당할 수 없으니
論心誰與共連床 마음을 펴는 데 누구와 더불어 자리를 같이 하리.
贈柳松菴* 유송암에게 줌
浮生擾擾路岐多 덧없는 인생 뒤숭숭하고 갈림길도 많아
屈指交遊今幾何 우리의 만남 헤아려 보면 지금으로 몇번인가?
兩地心情知不隔 서로의 입장과 심정 멀지 않음을 아는데
書來奚 得隋和** 소식 한자 받기가 어찌 수후의 구슬, 화씨의 구슬 얻기처럼 어려운가?
▒ 상세설명
*유송암 ; 유평. 인조때 의병, 자는 화보. 호는 송암.
* 수화(隋和) ; 수후지주와 화씨지벽, 둘다 천하의 보배를 말함.
題安心寺 안심사에서
層巖聳出倚雲宵 겹겹이 쌓인 바위 하늘에 솟아 있고,
下有叢林遠市朝 아래는 울창한 숲 시장도 조정도 멀기만 하네.
淨土無塵宜八定* 티끌없이 맑은 세상 팔선정에 들기에 마땅하고,
奇遊有約好相邀 신비롭고 그윽한 한가함 속에 서로 만남이 좋기만 하네.
世情元自時人薄 세상의 인심은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경박해지니,
交道今從吾輩昭 사귐의 도, 이제 우리들로부터 밝히세.
醉舞 歌歡意足 취하여 춤추고 노래하며 즐거운 뜻에 만족하니,
半生塵慮己全消 반평생 세속의 근심 이제 모두 없어졌네.
▒ 상세설명
* 팔정(八定) ; 불교의 팔선정을 말하며 색계의 사선정, 무색계의 사선정이 있음.
悶雨 비를 걱정함
三農一雨治人心 모든 농부들 한 차례 비에도 마음이 풀리는데,
豈意今成十日霖 어찌해서 지금은 십일 간이나 내리는가?
愁倚板床觀野色 평상에 기대앉아 수심스럽게 들빛을 바라보며,
呼童僕問田沈 아이들 불러 발이 잠기나 나가보라이르네.
益無半菽 難借 동이에 반도 덜 찾는데 이미 빌리기도 어렵고,
門閉三時客不臨 하루종일 문을닫아 놓으니 길손 하나 들지 않네.
妻子勃磎何足道 처자(妻子)와의 다름을 어찌 다 할 수 있으리
老人頭痛亦云浸 노인의 두통 심하다 이르네.
述懷 회포를 읊음
百事無成歲月深 오만가지 일 이룬 것 없이 세월만 흘러가도,
許身猶自比南金* 사람을 대해 스스로를 남금(南金)같이 여길 수 있을까?
登山觀海十年夢 산에 올라 바다를 보니 십년의 꿈이 어리고,
入室昇堂千古心 집에 들어 마루에 오르니 천고의 마음에 어리네.
尺水何時飜巨浪 조그만 물이 어느 때에 커다란 물결은 뒤집을 것인가
老蟾容易點輕陰** 달을 보니 세월의 빠름을 쉽게 알 수 있네.
丈夫己失穿楊計***장부의 무공 무공계획(武功計劃) 이미 허사가 되니
白首空爲抱膝吟 백발이 되어 무릎을 끌어안고 부질없이 울고 있네.
▒ 상세설명
*남금(南金) : 품질이 아주 좋은 형주(刑州)와 장주(場州)에서 나온 황금.
*노섬(老蟾): 달의 별명(別名).
*천양계(穿楊計): 초(楚)나라의 양유기(養由基)가 백보밖에서 활을 쏘아 버들잎을 떨어뜨린 데서 유래한 말로 무술연마의 뜻
瑞石山二首 서석산(2수)
磅 根百里問 넓고 꾸불꾸불한 산자락은 백레에 뼏혀있고,
穹?屹立壓群山 산봉우리는 우뚝 솟아 모든 산을 위압하네.
軒窓朝暮空回望 행랑채 창문에는 아침저녁으로 공연히 두리번거리면,
笑我塵埃未暫問 티끌처럼 한순간도 못되는우리네 삶이 나를 비웃는 듯하네.
半生歸計負玆山 반평생을 돌아와 이산에 의지하며,
幾歎雲林斷往還 깊은 숲에 머물러 나가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던가
羨君長對軒窓下 그대(瑞石山) 흠모하여 행랑채 창문아래 마주해 서서,
謠望圭峰錦石間 멀리 규봉암(圭峰巖)의 아름다운 바위를바라보고 있네.
聞南漢 成 남한산성에서 강화 소식 듣고
淚望漢江頭 한강 머리 눈물 흘리며 바라보니,
失宗 自流 종묘사직 잃음에 강물도 슬퍼하며 흐르네.
天綱墜日月 하늘의 강기(剛紀)가 해와 달을 떨어지게 하고,
時義掃春秋 시절(詩節)의 뜻이 역사를 말살시키는가 ?
東稻連寧死 동쪽으로 달리자니, 바다에 연(連)해 죽을 수밖에 없고,
北征杜肯休 북쪽으로 치자니 길이 막혀 그만둘 수밖에 없네.
蒼茫窮巷路 아득히 마음길들은 막혀있고,
孤憤恨悠悠 외로운 울분과 분함 끝이 없네.
重陽携諸友登南山 절중구날 친구들과 삼산에 올라
九九登高處 중양절(重陽節)에 높은 곳에 올라
傳杯爲解愁 술잔 돌리며 근심을 푸네.
賞心眞好會 경치를 즐기는 마음속으로 참으로 화목한 만남,
携手是奇遊 서로 손잡고 이끄니, 이는더할 수 없는 나들이 이어라.
觀笑回靑眼 웃는얼굴 처다보고 검은 눈동자 굴리며,
淸談愧白頭 욕심없는 얘기를 나누니, 늙음이 부끄럽네.
莫辭相取醉 서로들 취함을 사양하지 말라.
恐負菊花秋 핀 가을을 저버릴까 두렵구나.
應京試不中歸家道中作 경시(京試: 小科의 初試)에 떨어지고 집에 돌아가는 중에
遠客催歸路 고향을 멀리 떠난 나그네, 돌아갈 길 재촉하고 있는데,
西山日己頹 서산에 해는 이미 저물었구나.
向南心幾往 고향을 향하여 마음을 몇 번이나 달려가도,
戀北首空回 벼슬에 대한 미련으로 부질없이 고개를돌리네.
苦意須待解 괴로운 마음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풀리고,
愁顔待月開 근심스런 얼굴은 달이라도 뜨면 펴질거나,
山外鳥低廻 산을 벗어난 새처럼 배회하고 있는가?
1.작자 약전(略傳)
고부민(髙傅敏, 1577-1642)은 자는 무숙(務叔), 호는 탄음(灘陰)으로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죽촌 고성후인데, 고성후는 종숙부인 충열공 제봉 고경명에게서 수업하였고, 인물됨이 훌륭하고 영리해서 제봉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제봉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는 제봉을 도와 군공(軍功)을 세웠다. 그는 그 공으로 익산군수를 제수받기도 했는데, 제봉이 죽자(1592), 이듬해에는 권율의 막하로 가서 행주싸움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탄음 고부민은 강수은에게서 글을 배워서 일찍이 유학과 문예를 크게 성취했다. 그는 인조5년(1672),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제인 고부필과 삼종 고부립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탄음은 "금산의 순절과 진주성의 함몰은 비록 시변이라고는 하나, 그 국치를 아직 잊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는데, 지금 북쪽 오랑캐가 다시 창궐하여 이 땅에 이르니, 이 나라 신하와 백성이 된 사람들은 마땅히 몸을 살피지 않고 적개심에 불타고 있다. 나는 마땅히 진주성과 금산에서의 억울함을 잊지 못하는 병사들을 모아, 오랑캐를 무찌르다가 죽어 천하에 대의를 밝혀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으리라" 하고 의병을 모으기에 앞장섰다.
이때, 탄음 고부민의 재종숙인 정헌공 고순후가 김장생의 추천을 받아 호남의병장이 되었는데, 탄음은 동지 수십명과 그 막부에 이르러 의병과 군량을 모으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기세를 얻어 북으로 행하던 중, 완산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되고 적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통한을 머금고 물러나 두문불출했다.
또, 병자호란때에도 탄음은 동지 오천여명을 규합하고 군량을 모아 서울로 향하던 중, 청주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하늘의 강기가 해와 달을 떨어뜨리고, 시절의 뜻이 역사를 말살시키는가 (天綱墜日月 時義掃春秋)"라는 시를 짓고 자연에 묻혀서 일생을 마쳤다.
탄음 고부민은 방손인 고공진은 탄음의 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부민 선생은 호란이 강화를 하게 되어 공훈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 의열은 충분히 기에 새기어 찬사할 만하다. 그 근원으로 말하면 사계의 학문을 바로 배워 정자와 주자를 쫓았고, 가정으로 말하면, 죽촌공의 문장과 행업을 백세에 떨칠 만하고 집안으로 말하면, 충열공의 충성심과 의정이 천고에 빛나니, 고부민 같은 사람은 그 충열을 이어 후통을 빛낸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탄음 고부민은 충절이나 덕망 학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될 만했다. 그는 스승의 학설을 연구하고 펴서, 크게는 천인과 성명(性命)을 궁구하고, 작게는 아주 미세한 사물도 분석하였을 뿐 아니라, 문장에 이르러서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체제를 갖추고 있어서, 그 이전의 다른 사람들의 진부한 말을 답습하지 아니 하였다. 또 그의 마음가짐에 있어서도 이해를 쫓아 움직이지 아니 하였고, 몸가짐에 있어서도 항상 삼가하여 모난 행동을 하는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는 온화한 얼굴로 접했고, 가사를 돌볼 때도 조정에서의 일처럼 질서를 두어 하곤 했다고 한다.
2.한시문 개관(槪觀)
「송학세고」는 탄음 고부민과 그의 아들 고두경의 문집이다.
원래는 이 두사람의 문집이 각각 따로 있었을 것이나, 전하면서 많이 산실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해방 후에 그 후손들이 고부민, 고두경 부자의 글들을 함께 모아 합철 편집한 것이 「송학세고」이다.
「송학세고」라고 한 것은 탄음의 조상들이 이조 초기부터 광주로 자리를 옮겨온 이래 대대로 송학산 기슭에서 살았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송학세고」1권인, 고부민의 문집에 시 97수, 제문과 기타 부록이 실려 있다. 제문은 강수은선생에 대한 것이고 부록에는 정묘강노입구시기사, 의병장차첩, 의거사실교문, 격문, 행장 등이 대부분이다.
탄음 고부민은 수은 강항에게서 학문을 배워 문사를 크게 이루었고, 또 사계 김장생에게서 성경을 익혀 심취한 바 컸다. 「송학세고」서문에는 "탄음의 시문이 이미 거의 산일되어 없어지고, 오직 시고일권만 전하는데, 척회지음이 큰 감명을 준다" 고 쓰고 있다. 척화지음이란 <문남한강성>이라는 시를 말하는데 종묘사직의 기강이 무너져내리는 데 대한 통한과 울분을 그리고 있는 시다.
또 <강수은선생만>이라는 시도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수은 강항은 탄음 고부민의 스승이자 의병장 이다. 그는 영광 출신으로 선조29년(1596) 공조 형조좌랑을 지냈고, 선조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조판서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남원에서 군량 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당한 뒤, 영광으로 도라가 의병 활동을 하다. 전세가 분리해지자 당시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기 위해 남쪽으로 가다가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학식이 높았기 때문에 일본 오오사카에서 학식높은 중들과 교유하며 유학을 가르쳐 주고, 그곳의 지리와 군사 등 적정 형편을 인편으로 고국에 보고 했다. 그리고 선조33년(1600) 포로에서 풀려 고국에 돌아와 선조35년 대구교수 등의 벼슬에 임명 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자처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시<강수은선생만>은 강항선생의 충절과, 나라에 크게 쓰일만한 재능을 가지고도 평범한 일생을 보냈던 선비의 담백한 삶의 모습을 그리면서, 사제지간으로서의 애틋한 정을 표현한 오언배율의 긴 시 이다.
탄음 고부민은 유평과도 가까이 지냈던 모양이다. 유평은 자는 화보, 호는 송암인데 인조때 의병활동을 했던 사람이니, 그런 이유로 뜻이 통해 가까이 했던 모양이다. 그의 시에는 유평에 대한 시가 여러편 보이는데 <영송암정송>, <증유송암>, <송암이서래문감성절구2수>등 11수나 된다. 그중에서도 <영송암정송>은 칠언율시로 송암 유평의 뜰에 있는 소나무의 헌걸찬 모습을 그리면서 송암이라는 유평의 호와 의병 활동을 했던 그들의 기상을 의미있게 암시하면서 시상을 전개해나가고 있는데, 가히 빼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깝게도 경연에 한 자가 탈락되어 있다.
이상의 작품들이 대개 그가 의병 활동에 뜻을 두었다거나, 의병장 집안의 후예로서의 일면을 보여준 시들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시편들은 주로 그의 일상 생활의 감회를 읊은 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민우>는 장마철에 농민들의 번민을 읊고 있다. 이 시는 물에 논밭이 잠기고 곡식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며, 어린애들의 다툼과 식구의 질병들에 마음을 쓰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3.한시문 발췌 번역(拔萃飜譯)
次善養亭韻 선양정 시운에 따라
占斷幽棲志 늘 그윽한 곳에서 살기를 바랬더니,
誅茅始卜居 비로소 띠풀 베어 초가집 얽었네.
耕雲巢父趣* 구름과 마음을 같이 하여 소부의 뜻을 쫓고,
釣月子陵?** 달을 벗하며 자릉의 뒤를 쫓네.
濯足溪邊石 개울가 돌에 앉아 발을 씻고,
開襟松下盧 소나무 아래 정자에서 옷섶을 여네.
亭名善養意 정자의 이르이 뜻을 좋게 키운다 했으니,
應不在樵漁 마땅히 나무하고 고기낚는 데는 마음을 두지 않노라.
▒ 상세설명
*소부(巢父) ; 요임금 때의 은사로 요임금이 천하를 맡기고자하여도 받지 않고 숨어 삼.
*자릉(子陵) ; 후한때 엄광을 말함. 어렸을 때 광무와 같이 공부를 하였는데, 광무가 임금이 되자 성명을 바꾸고 숨어 지냄.
姜睡隱先生換* 강수은 선생의 별세에 부쳐
我愛姜夫子 내 강수은 선생을 사모하노니,
能傳不朽名 능히 불후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리.
文章元小技 문장은 원래 잔 재주이고,
節義本忠貞 절의는 본래 올곧은 정성인 것을,
爲國身何惜 나라를 위하는 데 어찌 몸을 아끼리?
臨危命亦輕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목숨 또한 가벼이 여겼네.
一封肝血字 편지에 담긴 정성스런 글은,
萬里戀君誠 만리타국에서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스런 마음.
完璧誰無感**인상여의 화씨벽에 누가 감격하지 않으리.
知人世不明 어진 사람을 세상이 분별하지 못할 뿐이었네.
車空老驥 준마같은 노신, 헛되이 소금 수레나 끌다가,
谷口竟歸耕 마침내 산촌으로 돌아와 농사나 짓고 살았네.
心事遵先哲 마음은 옛날 어진 사람들을 쫓으며,
生涯混野珉 일생을 농사꾼들과 함께 했도다.
百年嗟易暮 아! 인생백년이 이리 쉽게 저무는가?
五鼎未終榮 벼슬길에서는 끝내 영화 한번 못 구했네.
牢落吾安放 나의 적막한 마음을 어찌 할거나?
嗚呼奠兩楹 아아! 대청 기둥 사이에 빈소를 정했네.
德尊年不稱 덕은 높아 해를 두고도 일컬을 수 없는데,
天意杳難評 하늘의 뜻은 묘연해 헤아리기 어렵구나.
師友兼姻 존장들이나 동지들, 사돈과 동서들도,
傷心等弟兄 슬퍼하기를 형제를 잃은 것 같이 하네.
不堪埋白璧 차마 시신을 묻을 수 없어,
揮淚向佳城 눈물을 흘리며 묘지를 향하네.
▒ 상세설명
* 강수은 ; 강항(1567-1618) 학자, 의병장, 자 태조, 호는 수은, 영광출신, 정유왜란 때 남원에서 군량 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되자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학식높은 중들과 교유하며 그들에게 유학을 가르쳐주고, 적정을 고국에 알려줌.
*완벽 ; 흠이 없는 구슬이라는 뜻이나, 중국 전국시대 때 조나라 신하인 상여가 진나라 소양왕이 자기의 열다섯 성과 조나라의 화씨지벽과 바꾸자고 하였을 때, 소양완의 간계를 간파하고 사신으로 가서 구슬을 보존하여 오므로 해서, 훌륭한 신하와 관련해서 쓰이는 말이다.
幽居述懷 숨어지내는 감회를 읊음
誅茅新卜博山陽 띠풀 베어 박산의 양지쪽에 초가집 엮으니
瑞石層峰看渺茫 서석산 봉우리들이 아련히 떠오르네.
屈曲前川如有護 굽이굽이 흐르는 앞 냇물이 감싸주는 것 같고
蕭條村落不成行 적막한 시골이라 나들이에 마음쓸 일 없네.
窮居自任蓬高下 궁벽한 곳, 초가집에 자신을 내맡기고 추려
序 何 藜藿場 어찌 거친 쌀에, 명아주, 콩잎 밥상을 꺼리겠는가?
春夢幾驚鷄報曉 새벽 닭 울음소리에 봄잠 몇번이나 깨었고
秋懷頻見雁呼想 기러기 불음소리에 가을의 회포 몇번이나 느꼈는가?
徒傷老大知無奈 다만 늙어감을 어찌할 수 없어 슬퍼하며
苦戀明時念不忘 살기 좋은 때를 깊이 바라, 마음속에 잊지 못하고
這裡難堪多少恨 그속에 많은 한 감당할 수 없으니
論心誰與共連床 마음을 펴는 데 누구와 더불어 자리를 같이 하리.
贈柳松菴* 유송암에게 줌
浮生擾擾路岐多 덧없는 인생 뒤숭숭하고 갈림길도 많아
屈指交遊今幾何 우리의 만남 헤아려 보면 지금으로 몇번인가?
兩地心情知不隔 서로의 입장과 심정 멀지 않음을 아는데
書來奚 得隋和** 소식 한자 받기가 어찌 수후의 구슬, 화씨의 구슬 얻기처럼 어려운가?
▒ 상세설명
*유송암 ; 유평. 인조때 의병, 자는 화보. 호는 송암.
* 수화(隋和) ; 수후지주와 화씨지벽, 둘다 천하의 보배를 말함.
題安心寺 안심사에서
層巖聳出倚雲宵 겹겹이 쌓인 바위 하늘에 솟아 있고,
下有叢林遠市朝 아래는 울창한 숲 시장도 조정도 멀기만 하네.
淨土無塵宜八定* 티끌없이 맑은 세상 팔선정에 들기에 마땅하고,
奇遊有約好相邀 신비롭고 그윽한 한가함 속에 서로 만남이 좋기만 하네.
世情元自時人薄 세상의 인심은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경박해지니,
交道今從吾輩昭 사귐의 도, 이제 우리들로부터 밝히세.
醉舞 歌歡意足 취하여 춤추고 노래하며 즐거운 뜻에 만족하니,
半生塵慮己全消 반평생 세속의 근심 이제 모두 없어졌네.
▒ 상세설명
* 팔정(八定) ; 불교의 팔선정을 말하며 색계의 사선정, 무색계의 사선정이 있음.
悶雨 비를 걱정함
三農一雨治人心 모든 농부들 한 차례 비에도 마음이 풀리는데,
豈意今成十日霖 어찌해서 지금은 십일 간이나 내리는가?
愁倚板床觀野色 평상에 기대앉아 수심스럽게 들빛을 바라보며,
呼童僕問田沈 아이들 불러 발이 잠기나 나가보라이르네.
益無半菽 難借 동이에 반도 덜 찾는데 이미 빌리기도 어렵고,
門閉三時客不臨 하루종일 문을닫아 놓으니 길손 하나 들지 않네.
妻子勃磎何足道 처자(妻子)와의 다름을 어찌 다 할 수 있으리
老人頭痛亦云浸 노인의 두통 심하다 이르네.
述懷 회포를 읊음
百事無成歲月深 오만가지 일 이룬 것 없이 세월만 흘러가도,
許身猶自比南金* 사람을 대해 스스로를 남금(南金)같이 여길 수 있을까?
登山觀海十年夢 산에 올라 바다를 보니 십년의 꿈이 어리고,
入室昇堂千古心 집에 들어 마루에 오르니 천고의 마음에 어리네.
尺水何時飜巨浪 조그만 물이 어느 때에 커다란 물결은 뒤집을 것인가
老蟾容易點輕陰** 달을 보니 세월의 빠름을 쉽게 알 수 있네.
丈夫己失穿楊計***장부의 무공 무공계획(武功計劃) 이미 허사가 되니
白首空爲抱膝吟 백발이 되어 무릎을 끌어안고 부질없이 울고 있네.
▒ 상세설명
*남금(南金) : 품질이 아주 좋은 형주(刑州)와 장주(場州)에서 나온 황금.
*노섬(老蟾): 달의 별명(別名).
*천양계(穿楊計): 초(楚)나라의 양유기(養由基)가 백보밖에서 활을 쏘아 버들잎을 떨어뜨린 데서 유래한 말로 무술연마의 뜻
瑞石山二首 서석산(2수)
磅 根百里問 넓고 꾸불꾸불한 산자락은 백레에 뼏혀있고,
穹?屹立壓群山 산봉우리는 우뚝 솟아 모든 산을 위압하네.
軒窓朝暮空回望 행랑채 창문에는 아침저녁으로 공연히 두리번거리면,
笑我塵埃未暫問 티끌처럼 한순간도 못되는우리네 삶이 나를 비웃는 듯하네.
半生歸計負玆山 반평생을 돌아와 이산에 의지하며,
幾歎雲林斷往還 깊은 숲에 머물러 나가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던가
羨君長對軒窓下 그대(瑞石山) 흠모하여 행랑채 창문아래 마주해 서서,
謠望圭峰錦石間 멀리 규봉암(圭峰巖)의 아름다운 바위를바라보고 있네.
聞南漢 成 남한산성에서 강화 소식 듣고
淚望漢江頭 한강 머리 눈물 흘리며 바라보니,
失宗 自流 종묘사직 잃음에 강물도 슬퍼하며 흐르네.
天綱墜日月 하늘의 강기(剛紀)가 해와 달을 떨어지게 하고,
時義掃春秋 시절(詩節)의 뜻이 역사를 말살시키는가 ?
東稻連寧死 동쪽으로 달리자니, 바다에 연(連)해 죽을 수밖에 없고,
北征杜肯休 북쪽으로 치자니 길이 막혀 그만둘 수밖에 없네.
蒼茫窮巷路 아득히 마음길들은 막혀있고,
孤憤恨悠悠 외로운 울분과 분함 끝이 없네.
重陽携諸友登南山 절중구날 친구들과 삼산에 올라
九九登高處 중양절(重陽節)에 높은 곳에 올라
傳杯爲解愁 술잔 돌리며 근심을 푸네.
賞心眞好會 경치를 즐기는 마음속으로 참으로 화목한 만남,
携手是奇遊 서로 손잡고 이끄니, 이는더할 수 없는 나들이 이어라.
觀笑回靑眼 웃는얼굴 처다보고 검은 눈동자 굴리며,
淸談愧白頭 욕심없는 얘기를 나누니, 늙음이 부끄럽네.
莫辭相取醉 서로들 취함을 사양하지 말라.
恐負菊花秋 핀 가을을 저버릴까 두렵구나.
應京試不中歸家道中作 경시(京試: 小科의 初試)에 떨어지고 집에 돌아가는 중에
遠客催歸路 고향을 멀리 떠난 나그네, 돌아갈 길 재촉하고 있는데,
西山日己頹 서산에 해는 이미 저물었구나.
向南心幾往 고향을 향하여 마음을 몇 번이나 달려가도,
戀北首空回 벼슬에 대한 미련으로 부질없이 고개를돌리네.
苦意須待解 괴로운 마음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풀리고,
愁顔待月開 근심스런 얼굴은 달이라도 뜨면 펴질거나,
山外鳥低廻 산을 벗어난 새처럼 배회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