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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리(髙敬履)선생의「창랑실적(滄浪實蹟)」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0-01-23 19:33
조회
4871




고경리(髙敬履선생)의「창랑실적(滄浪實蹟)」


1.작자 약전(略傳)


고경리(髙敬履)는 자가 이척(而 )이요, 호가 창랑(滄浪)이다. 명종 15년(1560)광주의 버드실(柳等谷)에서 태어나 광해군 1년(1609)에 향년 오십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고계영(髙季英)인데 성균진사 였으나 벼슬하지 아니 하였고, 어머니는 제주양씨(濟州梁氏) 응기(應箕)의 딸인데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손녀이다. 또한 그는 임란(壬亂) 의병장 (義兵將)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髙敬命)의 사촌 동생이기도 하다. 원조(遠祖)는 고려 검교(檢校) 고복림(髙福林)이요, 증조(曾祖)는 성균생원(成均生員) 봉직랑(奉直郞) 고자첨(髙自僉)이요, 조부(祖父)는 이조좌랑(吏曹佐郞) 고운구(髙雲俱)다. 그의 조부 고운구는 조정암(趙靜庵), 박눌재(朴訥齋)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가 백이론(伯夷論)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벼슬을 버리고 환향하였다.

고경리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빼어나고 행동거지에 절도가 있었다 한다. 특별한 가르침이 없었는데도 혼자 책을 읽었는데 스스로 깨우침이 있어 경사(經史)에 박통할 정도로 총명하였던 까닭에 아버지가 사랑하여 말하기를 "우리집 아이는 틀림없이 선열(先烈)을 이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열살 되던 해인 선조 3년(1570)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상례를 어른처럼 집례하였다 한다. 사촌형인 고경명에게 나아가 책을 읽었는데 주야를 가리지 않고 독서를 탐닉하였으며, 문장이 빼어나 보고 감탄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장구지학(章句之學)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이 굵고 대범하였으며 원대한 포부를 지녔다. 글의 뜻을 찾는데 절로홀로 깨닫는 바가 많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철두철미하여 막히는 일이 없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침잠 반복 음미하여 기꺼히 뜻을 밝히고야 말았다 한다. 선조 24년(1591)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연산(連山)의 사계(沙溪) 김선생에게 나아가 글을 배워 더욱 크게 깨우침이 있었다.

그의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늙으막에 호수 위에 띠집을 얽고 편백을 창랑(滄浪)이라 하였으며 손수 기(記)를 지었다. 시를 지어 읊었는데 대개 산수를 완상하는 홍취를 읊었고 무리를 모아 강론을 하였다.

일찍이 우계(牛溪) 송강(松江) 두 선생의 신의를 밝힘에 있어 뜻을 같이 하는 동지를 모아 상소를 올려 변론하였으나 조정에 가득한 간악한 무리가 그 소를 태워버리고 그를 가두도록 주청하였다. 그가 평생토록 악(惡)을 원수처럼 여김으로써 여러번 미움을 받았으나 화복(禍福)이나 이해(利害) 때문에 그 신조를 바꾸지 않았던 바 그 위무(威武)를 굽히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므로 무룻 호남의 280인의 선비들이 일제히 규합하여 성토함으로써 그를 위해 변론하였으니 당세에 그가 차지한 비중이 얼마만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부인은 눌재 박상(朴祥)의 손녀였다. 스승은 사계였으며, 송해광(宋海狂), 권석주(權石洲), 임명고(任鳴皐), 안우산(安牛山) 등이 그의 벗이었다.

2. 한시문 개관(槪觀)

고경리의 한시문은 그의 문집인「창랑실적(滄浪實蹟)」에 실려있다. 「창랑실적」은 3권 단책으로 정조 11년(1787)에 그의 9세손 고정진(髙貞鎭)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후 70년 뒤 철종 8년(1857)에 중간되었는데 원 유고에 송치규(宋穉圭)의 서(序)와 박광일(朴光一)의 발(跋)을 덧붙였다. 그리고 중간본에는 홍기섭(洪耆燮)의 후서(後敍)가 붙어 있다.

「창랑실적」은 1권이 고경리의 순수한 유고인데 이에 실려있는 그의 한시문은 다음과 같다.

  賦  滄浪亭立春賦

  詩  輓從姪郡守

  疏  伸救牛溪松江兩先生疏

     兩司啓箚後者明疏

  書  戒子書, 立志, 讀書, 接物, 答辛上舍應純書

  雜著 天君傳, 養心求放心疑

  遺稿跋

이같은 그의 유고 내용은 생전의 명성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빈약한 것인데 그것은 사후 정조 5년(1781)에야 문집이 간행된 까닭에 그 사이 많은 시문(詩文)이 일실 되어버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2권은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제문(祭文)과 행장(行狀), 묘표(墓表), 묘지명(墓地銘)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3권에는 세계(世系)와 연보(年譜)가 실려 있다.

3. 한시문 발췌 번역

輓從姪郡守 종질 고군수의 죽음에 부쳐

半生勤苦方等第 반평생 애써서 이제 급제했는데

十載英名乃己焉 10년 꽃다운 이름이 이에서 끝나는가.

勳多討賊裳遷秩 왜적 토벌 공훈 많아 벼슬을 옮겨

享厚專城祗一年 고을 맡아 다스린지 단지 1년이었네.

爵不滿功雖可恨 공에 덜 찬 벼슬 비록 한이 될만하건만

身無素食亦云全 놀고 먹지 않음만도 불만 없다 하였네.

賴有二男誠孝篤 믿음직한 두 아들 효성이 두터우니

貧家能以禮終天 가난한 집이지만 마지막까지 예를 갖추는구료.

 立    志 입지

美質易得至道難聞學之至則可以爲聖人不學則不免爲鄕人可不勉哉(戒子書)

훌륭한 자질을 얻기는 쉬우나 자극한 도를 듣기는 어려우니라. 배움이 지극하면 성인이 될 수 있으나 배우지 않으면 촌놈이 됨을 면키 어려우니 어찌 애쓰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들을 훈계하는 편지]

 讀    書 독서

嘗看伊川說看得此二書切己終身 多云未知文義之所在直以爲看得二書中切己好文字而己近覺(其不然)

所謂看得而切己云者不但知見誦說而己乃謂反覆沈替切於己而有得也若然則二書中多少文義皆爲己有取

諸左右而逢其原矣終身 多豈虛語哉如此然後方爲讀書不然而記誦而己則書自書我自我而何有乎受用哉

雖讀取萬卷不過爲書律矣聞汝讀論語此固切於初學然汝於立志初須依法從大學來此不費力汝於大學已熟

須與李生通讀一過其規模體用知行愼獨等處十分點檢入心記着後只以經傳循環念讀五六十遍後可及論語

雖至讀語孟時亦時時念過不置治語孟亦依此法逐日課誦五六章或七八章須先以註釋照見經義沈潛反覆看

得文義曉然後舍輯說只以經念過五六十遍時以註釋照見經義或點 輯說中切要好文字念過則省力而有得

宋丈嘗言舍註讀經之好因思不須如此經約須耐煩适通透文義後只念經說爲佳也汝弟在此亦令念(下略)

일찍이 이천의 내용을 보니 "看得此二書切己終身 多 이 춘추좌씨전을 이해하고 마음에 두고 새기기를 평생토록 여러번 했다."라는 말이 있었다. 글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만 다만 "看得二書中切己"라는 글자를 자주 읽어 익히다 보면 깨달음에 점점 가까워진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소위 "看得而切己"라고 하는 것을 단지 내용을 보고 읽을 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이를 뒤집어 곰곰히 생각하여 자기 마음에 새기게 되면 얻는 바가 있게 됨을 이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서(春秋佐氏傳)의 글뜻이 많이 자기 것이 되었으니 늘 좌우에 두고 거기서 취하여 옴으로써 그 근본을 만나게 될 것이니 "終身 多"라는 말이 어찌 빈 말이겠느냐. 이와 같이 한 연후라야 비로소 책을 읽었다 할 수 있으니 그렇지 아니하고 암기하고 읊조리기만 할 뿐이라면 책은 책대로요, 나는 나대로일 터이니 어찌 얻는게 있을 것이냐. 비록 만권의 책을 읽었다

할지라고 책 가게에 불과할 것이다. 네가 논어를 읽는다고 들었다. 이것이 초학(初學)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네가 입지의 시초에 모름지기 이런 방식에 의지해서 대학(大學)에 까지 나아간다면 별로 힘들지 않고 대학에서는 벌써 익숙해질 것이다. 모름지기 이생(李生)과 더불어 한번 통독을 하고 나서 규모(規模)나, 체용(體用), 지행(知行), 신독(愼獨) 등에 있어서 충분히 점검하여 대처하도록 하여라. 책의 내용이 마음에 들어가 기착된 뒤에주석서를 읽어라. 돌려가며 염독(念讀)하기를 오륙십번 한 후라야 논어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논어 맹자를 읽을 때라도 역시 때로 염과(念過, 뜻을 깊이 생각지 아니하고 읽고 지나침)하지 않도록 해라. 날마다 오륙장 혹은 칠팔장을 읽도록 하거라. 모름지기 먼저 뜻을 골똘히 생각하고 되짚어 간득함으로서 글 뜻을 깨닫고 난 뒤에야 집설(輯說)을 해라. 단지 경서를 오륙번 염과하기만 한다면 때로 주석을 본다 해도 경서의 뜻은 그저 점철될 뿐이다. 집설 주의 중요한 대목은 문구를 반복하여 익혀 두면 염과할 때 힘을 덜 들이고 깨달을 수 있다. 송씨 어른께서 일찌기 말씀하시기를 주석을 다는 것이 경서를 읽는데 다른 좋은 요인이 되며 모름지기 번거로움을 참고 책을 일삼아 읽어 글의 뜻이 철저하게 통한 뒤에 경의 내용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하시었다. 네 동생도 이점 영념하도록 말해 주어라. [하략]

 輓  詩  만시*

溫良由素性 온유하고 어진 마음은 근본 성품이요

正直出天眞 정직은 하늘에서 타고 난 진실이라.

鄕黨咸稱長 온 고을이 입을 모아 칭송하고

儒林共許醇 유림들도 순후한 인품에 감탄했다네.

仁賢還不壽 어진 사람이 오히려 장수하지 못하니

愚魯竟誰親 어리석은 사람들 누구를 친히 하랴.

永負南阡哭 남쪽 언덕에 영영 묻힐 사람

徒嗟病裏身 곡하노니 병든 몸이 한그럽구료.

▒ 상세설명

* 만시(輓詩) :  고경리의 죽음을 애도해서 그의 벗이었던 석주 권필이 지은 만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