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씨중앙종문회 02)755-0919
고씨종문회총본부 064)751-0711, 758-5355
만든이 중시조32세손 고재민 jemina23@naver.com

종문자료실

Created with Sketch.

제주 화북동(거로마을) 능동산[(고봉례(髙鳳禮) 성주묘]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0-03-16 19:50
조회
3387
 





성주묘 星主墓(방형석축토광묘)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동 거로마을 능동산
시대 : 조선 초
유형 : 옛무덤

제주시에서 동부산업도로로 들어가는 길목의 네거리를 곧 지나면 남쪽으로 황세왓 북쪽으로 거로마을로 갈라지는 좁은 네거리가 있다. 여기서 거로쪽으로 들어가면 거로교(巨老橋)가 있고 다리에 붙어서 오른쪽으로 비탈진 농로가 있는데 비탈길을 내려가면 바로 길이 두 갈래로 갈린다. 왼쪽 길을 따라 100여m 가면 길이 끊기고 감귤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밭 안의 통로를 따라 100여m 되는 곳까지 가면 창고가 보이고 창고 북동쪽 동산에 성주묘가 있다.

성주(星主)란 탐라왕국의 왕의 호칭이었다. 즉 성주묘는 탐라왕의 왕릉을 뜻하는 것이다. 거로마을 능동산의 성주묘의 주인공은 고봉례(髙鳳禮)와 그의 부인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알려지고 있다. 고봉례는 마지막 성주인데 그는 자신의 성주 직을 반납한 비운의 주인공이다. 서기1402년 분에 넘치는 직위라 하여 반납한다고 했다.(열린제주시정소식 4330. 4. 24, 제주도지 795쪽) 고봉례는 목호토벌과 민란발생이 있었던 직후인 우왕13년 4월에 星主인 부친 고실개(髙實開)를 따라 개경에 갔다가 「軍器少尹」으로 임명되었으며, 창왕즉위년(서기1389) 9월에는 「濟州畜馬兼安撫別監」으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파견된 사실이 있다. 부친 고실개는 성주로서 당시 차현유가 난을 일으켜 안무사·목사·마축사 등을 살해하고 관사를 불태우고 우마를 宰食했을 때 진무 임엄·천호 고덕우·본토인 문신보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난을 소탕한 사람이다(제주도지 785∼787쪽)

묘의 구조는 가로 3m, 세로 4m 정도의 방묘(方墓)로, 2기가 90∼95c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남향을 하고 있다. 왼쪽 묘에는 두께 30cm, 가로 80∼100cm, 높이 70∼80cm 정도의 돌을 이용하여 벽을 세우고 그 속에 흙을 채웠었다. 판석석실형 고인돌을 연상케 하는 구조이다. 높이 70∼80cm 중에서 30∼40cm 정도는 땅 속으로 들어가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돌은 잘 다듬은 돌이 아니라 평평한 현무암 자연석을 사각형 모양의 직선이 되도록 일부 잘라내어 거친다듬한 것이다. 일부는 가로 세로 40∼50cm의 작은 돌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4330년 5월 5일 답사 당시 보니 발굴작업을 하다가 멈춘 상태인데 무덤 속에는 숯을 묻었던 것이 남아 있다.

오른쪽 묘에는 왼쪽 묘와 같은 큰 돌들을 사용하지 않고 직경 30∼40cm 정도의 자연석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취했다. 편평한 면을 바깥쪽으로 가게 하고 삐죽한 면을 안쪽으로 가게 해서 전체적으로는 편평한 면을 이루어 왼쪽의 묘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었다. 이 무덤에서는 숯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 묘를 성주묘라고 추정하는 단서는 다음과 같다.

①마을 사람들이 이 묘가 있는 곳을 '능동산'이라고 부른다. 능(陵)은 왕의 무덤을 말한다.

②고씨세보(髙氏世譜)상의 고봉례의 묘 위치와 거의 일치한다. 즉 고씨집안의 족보에 고봉례의 묘가 거로마을 능동산에 '남변임좌(南邊壬坐)되어 있다'고 한 것과 현재의 묘 위치와 일치한다.

③방묘(方墓)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유행된 묘제(墓制)인데 시기적으로 볼 때 고봉례의 생존 연대와 같다.

④일반인의 무덤에 비해 축조 방식이 다르고 크다. 전체적으로 정교하게 이루어진 축조 방법은 물론 경사진 지형을 일정한 높이로 쌓고 시신은 방형의 곽을 만들어 깊게 묻은 축조 방식은 분묘조성시에 다수의 인력이 동원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⑤이 묘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고봉례 성주의 사망년대와 비슷한 시기의 것이다. 즉, 출토된 상감청자·백사청자 등 10편의 출토유물들의 사용년대가 조선초기 이전인 점을 감안한다면 묘의 조성 시기가 늦어도 조선초기로 볼 수 있으며, 이 또한 문헌이 전하는 고봉례 성주의 사망년대인 태종11년(서기1411)과 일치한다.

(열린제주시정소식 4330. 4.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