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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빛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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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홍달(髙弘達) 조선 중기의 학자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03 14:18
조회
13623
1575(선조 8)∼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달부(澾夫)이며 호는 노곡(老谷) 또는 죽호(竹湖)라 하고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문충공 경의 후예이며 제원군(濟原君) 사렴(士濂)의 손자이며 참의 현(晛)의 아들로 부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효우가 지극하였으며 경학에 전심하였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용만으로 서행을 할 때에  호위를 하였다. 그공으로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1605년(선조38)에는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다. 그리고 광해조(光海朝)때에 문과(文科)에 응시하려 서울에 올라갔는데 때마침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자는 이른바 폐모론(廢母論)이 일고 있음을 보고는 과거를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있다가 1623년(인조1)에는 봉곡 김동준(鳳谷 金東準)과 함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복위상소를 올리려 서울에 올라갔더니 때에 이미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으므로 인조(仁祖)의 등극을 축하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어 천거를 받아 선공감 참봉(繕工監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했다. 그리고 1624년(인조2)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니 동지들과 함께 의병과 군량을 보았으며, 1636년(인조14)의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의병을 모아 인조를 모시러 올라가다가 여산(礪山)에 이르러 화의가 맺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통곡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석주 권필(石洲 權鞸), 택당 이식(澤堂 李植)등과 도의로 교유하였다. 1644년(인조22)에 향년 70세에 돌아가셨다. 그가 돌아가신 뒤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의 증직이 내리었다. 그리고 그의 유고는『양현실기(兩賢實記)』란 이름으로 간행되어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