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명(髙敬命)선생의 위패가 안치된 종용사(從容祠)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0-10-13 21:38
조회
3994
충열공(忠烈公) 고경명( 髙敬命) , 의열공(毅烈公) 고인후(髙因厚)의 사우(祠宇)
제향일(祭享日) 음(陰) 8월18일, 충남 금산군 금산읍
종용사(從容祠)에는 중봉 조헌선생의 위패를 비롯한 21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 중에 중앙의 3위의 위패는 정면에서 보았을 때 좌로부터 제봉 고경명(髙敬命)선생, 중봉 조헌선생, 영규대사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위 세분은 임진왜란때 왜적과의 금산싸움에서 큰 역할을 하신 분들이다. 고경명 선생은 눈벌싸움에서, 조헌선생과 영규대사는 연곤평 싸움에서 의병 들을 이끌고 싸움을 지휘하셨던 분들이다.
그 외 18위의 위패는 위 세분들을 도와 그 밑에서 함께 싸우셨던 분들의 위패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셨던 세분들의 위패를 단을 높이하여 중앙으로 모신 것이다.
위패의 크기는 높이 69cm, 정면폭 32cm, 측면폭 20cm으로 모두 같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우리 민족혼 말살정책으로 종용사를 헐고 순의비를 폭파한 후 칠백의총의 토지를 강제로 팔아 경역(境域)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나 지역 주민들이 파손된 비석을 땅속에 묻어 보존함으로써 칠백의사의 호국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게 되었다.
해방후 1952년에 금산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의총을 보수하고 종용사를 다시 지었으며, 정부에서는 칠백의총을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5호로 지정하고, 1971년과 1976년 2차에 걸쳐 경내·외 정화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눈벌싸움
*고경명(忠烈公 霽峯 髙敬命)
이름은 경명(敬命), 호는 제봉(霽峯)이며, 시문(詩文)에 능하여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고, 명종(明宗) 13 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준재로 관직은 동래부사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60세의 노령으로 의병 7 천여 명을 거느리고, 근왕코자 북상하다가 금산 눈벌싸움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순절하시어,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좌찬성에 가증되었으며 충열(忠烈)의 시호가 내리고 광주 포충사에도 모시고 있다.
*고인후(毅烈公 鶴峯 髙因厚)
이름은 인후(因厚), 호는 학봉이며 의병장 고경명선생의 아들로 벼슬은 성균관권지(成均館權知)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함께 금산 눈벌 싸움에서 순절하시어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추증되고, 영의정에 가증되었으며 의열의 시호가 내렸다.
*한순(贈 判書 韓公)
이름은 순(楯)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평양 판관을 거쳐 남평현감 재임시 임진왜란을 맞아 금산 눈벌싸움 이후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하시니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의장(毅將)의 시호가 내렸다.
*류팽로(贈 承旨 柳公)
이름은 팽로(膨老) 호는 월파(月坡)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學諭)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선생의 종사관이 되어 금산 눈벌싸움에서 순절하시니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안영(贈承旨安公)
이름은 영(瑛) 호는 사제(思齊)이다. 고경명선생을 따라 의병에 가담하고 금산 눈벌 싸움에서 순절하시어 장악원첨정 (掌樂院僉正)에 추증되고 좌승지로 가증되었다.
*고선생 막좌(髙先生 幕佐)
1592년 7월 9일 금산 눈벌싸움에서 고경명선생과 함께 순절하신 이름모를 부장들과 사졸들을 한 위패로 모시고 있다.
*고선생 사졸(髙先生 士卒)
의병장 고경명선생을 따라 금산 눈벌 싸움에서 순절하신 이름모를 의병들을 한 위패로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