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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빛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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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髙敬命)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6:22
조회
124

1533(중종 28)∼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광주 압보촌(鴨保村)출생.  아버지는 대사간 맹영(孟英)이다.

1552년(명종 7)사마시에 제1위로 합격, 진사가 되고,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수석하여,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고, 이어서 공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형조좌랑 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부수찬 부교리를 거쳐 1563년 교리가 되었다. 이때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하는 데 참여하고 그 경위를 이량에게 몰래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곧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고향에 돌아와 고전을 탐독하거나 자연과 벗삼아 산수를 유람하면서 《유서석록 遊瑞石錄》을 저술하였다.

1581년(선조 14)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 김계휘(金繼輝)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서산군수로 전임되었는데, 명사원접사(明使遠接使) 이이(李珥)의 천거로 그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이어서 종부시첨정에임명되었다.

1583년 한성부서윤 한산군수를 거쳐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사복시첨정이 된 뒤 성균관사예를 거쳐 순창군수로  재직중 1588년 파직되었다.

1590년 승문원판교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곧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온 백성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의연히 일어서 마상에서 격문을 지어 각 도에 돌리고 의병을 규합,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나라에서는 선조 28년(1595) 선생과 함께 순절한 장남 종후와 차남 인후 삼부자를 위해 정문을 세웠고, 그뒤 선조 34년(1601) 국령으로 사우를건립하여 선생의 삼부자와 함께 의거 순절한 월파 유팽로(1554 ~ 1592), 청계 안영( ? ~ 1592) 등 다섯 분을 같이 배향하도록 하였다.

후에 선조 36년(1603) 사당에 '포충'이라는 액호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게 하였다. 현재 옛 사우 경내 건물로는 사당,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이 있으며, 1977년 정화시 충효당, 전사청, 청사영당, 고직사 등은 철거 정비되었다.

문집에《제봉문집(霽峰文集)》 저서에《유서석록(遊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