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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빛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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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천(髙傅川) 조선 중기의 문신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6:23
조회
202
1578(선조 11)∼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군섭(君涉), 호는 월봉(月峯).

아버지는 인후(因厚)이며, 어머니는 함풍이씨(咸豊李氏)로 관찰사 이경(李璥)의 딸이다.

1605년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5년(광해군 7) 38세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ㆍ지제교(知製敎)ㆍ사헌부장령 등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615년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을 제기하자 진사 정택뢰(鄭澤雷)와 함께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간신들의 폐모론을 배척하고 인륜을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였다. 1617년(광해 9)에 수의어사가 되어 간신들의 죄목을 들어 장계를 올리자 간신들의 반론으로 사도에 유배를 하였으나 바로 석방되었다.

1620년(광해 12) 주문사(奏聞使)의 서장관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623년 남평현감에 임명되고 뒤에 시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 왔다.

1624년 47세에 고향에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태인(泰仁)에 이르러, 이괄이 이미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바로 공조좌랑과 병조정랑에 임명되어 관서막부에 있다가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사직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다시 성균관 전적을 제수받아 성균관 유생들의 비리를 상소하여 바로잡았다. 이에 정사원종공신 일등에 올랐다.

1626년에 49세에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있는데, 1627년 정묘호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소호사(號召使)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종사관이되어 공주 등지로 피란가는 동궁(東宮)을 호가(扈駕)하고 전주에 도착하자 화친이 성립되어 집으로 돌아와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1628년 51세에 장령에 제수되고, 뒤에 선산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29년 52세에 다시 장령에 임명되어 궁가(宮家)를 혁파하고 내노(內奴)들은 면세하여 복호(復戶)해야 한다는 장계를 올렸다. 1631년 54세에 영암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35년 55세에 세자시강원 필선에 임명되고 다시 장령이 되었다가 성균관 사예로 전직되었다.

선생은 학문이 고매하고 천품이 겸손하고 공손하여 군자와 같으나 일을 당하여는 의리에 강하여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용기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옳고 그름을 명백히 변론함은 사람마다 다 하기 어려운데 선생은 의연히 행하였다.

저서로는 《월봉집》 9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