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리(髙敬履) 조선 중기의 유생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6:18
조회
233
1559(명종 14)∼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유생. 자는, 호는 창랑(滄浪).
아버지는 진사 계영(季英)이고, 어머니는 양응기(梁應箕)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집권한 대북세력이 서인학통을 공격하자 최영경(崔永慶)을 죽이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경에 빠져 있던 정철(鄭澈)과 성혼(成渾)을 두둔하는 상소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에서 선현으로 이름 높은 이언적(李彦迪)을 제외하였다는 이유로 대북세력에 의하여 상소는 불태워지고, 사림의 구호에도 불구하고 종신금고에 처해졌다.
1676년 광주(光州)에 건립된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으며, 지평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진사 계영(季英)이고, 어머니는 양응기(梁應箕)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집권한 대북세력이 서인학통을 공격하자 최영경(崔永慶)을 죽이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경에 빠져 있던 정철(鄭澈)과 성혼(成渾)을 두둔하는 상소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에서 선현으로 이름 높은 이언적(李彦迪)을 제외하였다는 이유로 대북세력에 의하여 상소는 불태워지고, 사림의 구호에도 불구하고 종신금고에 처해졌다.
1676년 광주(光州)에 건립된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으며, 지평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