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고광순(髙光洵)선생의 최후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1-08-10 22:38
조회
3435
지리산 연곡은 남으로 화개와 북으로 문수골을 끼고 있는 골짜기다. 예로부터 화개는 호남에서 영남을 오가는 관문으로, 마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찾아든 지리산 포수가 많이 살고 있어 고광순(髙光洵)선생은 일군과 전투할 때, 그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더욱이 문수골은 천연의 험한 요새이니, 이 두 곳의 지리를 이용하여 유격전술을 쓴다면 대일항전에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고광순(髙光洵)선생은 그렇게 판단하고 의병진을 유격전에 편리하도록 소단위로 재편성하여 날마다 훈련에 열중하였다.
그런 가운데 1907년 9월, 화개동에 일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만약 화개가 일군의 손아귀로 넘어가면 영남의병들과의 연락이 끊어져 영호남 양쪽 의병진이 곤경에 빠질 것으로 판단한 고광순(髙光洵)선생은 9월 9일 새벽에 군사들을 보내 적진을 급습토록 하였다. 고광순(髙光洵) 부대는 적 2명에게 중상을 입히고는 상당량의 무기를 노획하여 돌아오니 진중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적은 곳곳에서 의병들의 습격을 받자 대대적인 섬멸작전으로 맞섰다. 그들은 광주주둔군 기노(木野)중대와 오까사끼(岡峙)경찰대, 그리고 진해주둔 중포대대의 도꼬로(所)소대를 징발, 의병의 본거지인 연곡사를 공격목표로 하여 쌍계사에 집결하고 있던 중, 화개에 주둔한 부대가 9일 새벽에 고광순(髙光洵) 부대의 기습을 받았던 것이다.
고광순(髙光洵)선생은 적들이 9일의 기습을 보복하고자 병력을 크게 보강하여 화개동을 기지로 삼아 반드시 연곡으로 쳐들어 올 것으로 판단하여, 미리 선제공격으로 군사들을 두 갈래로 나눠 내려 보냈다.
“청봉(晴峯 髙光秀)은 일진을 거느리고 화개동 어구에 매복해 있다가 적이 이곳 연곡을 향하여 출정하거든 멀찍이 뒤따라오며 낌새를 살피어 후미를 공격하고, 정재(貞齋 尹永淇)는 또 다른 일진을 거느리고 연곡사 뒤쪽 상치재를 넘어가서 매복해 있다가 적이 연곡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이면 두 부대가 적의 앞을 동시에 공격하라. 한꺼번에 적의 앞뒤를 공격하면 적진은 반드시 교란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광순(髙光洵)선생의 오판이었다. 고광순(髙光洵)선생은 적의 본거지가 화개가 아니라 쌍계사라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9월 10일, 적은 화개를 제쳐 둔 채 쌍계사에 집결한 뒤 아군의 청봉 부대와 정재 부대가 화개에 거의 다다를 저녁 무렵에 쌍계사를 출발하여 곧장 가파른 계곡을 굽이굽이 기어올라 9월 11일 새벽 6시 무렵에 연곡사를 여러 겹으로 완전히 포위했다.
▲ 의를 위하여 목숨을 던지다
희끄무레한 새벽녘 사이로 초병이 몸을 숨기고 언저리를 살펴보니 연곡사는 이미 적의 병력으로 완전히 포위되었다. 초병의 숨가쁜 보고를 들은 고광순(髙光洵)선생은 그제야 아군과 적의 진격로가 서로 엇갈렸음을 깨닫고, 마침내 최후 결전을 준비하였다.
고광순(髙光洵)선생은 “의를 위하여 목숨을 던지는 것은 큰 종기에 침질 한 번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見義捨身 如大腫一針)”고 하던 평소의 신념을 행동으로 보일 때가 온 것을 직감했다. 잠시 감았던 눈을 뜨고는 좌중을 둘러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이 병력으로는 적과 싸워 전혀 승산이 없으나, 나는 이미 나라를 위하여 한 몸 바치기로 한 사람이니 적탄에 맞아 죽으려니와, 인봉은 군사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 뒷날을 도모하라. 특히 광훈은 네가 맡은 각종 군부(軍簿)들이 절대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군령이다.”
고광순(髙光洵)선생은 말을 마치자마자 총을 들고 방을 뛰쳐나가 적진을 향해 소리쳤다.
“이놈들! 너희들은 내 집안과 나라의 원수다. 내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너희들의 씨를 말리고 말 것이다.”
고광순(髙光洵)선생은 적을 연곡사 계곡으로 유인하여 동백나무 그루터기에 기대어 총알이 다할 때까지 쏘고 또 쏘았다. 인봉을 비롯한 다른 군사들도 대장의 뒤를 따랐다. 적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사격을 가해 왔다. 적은 30여분 동안이나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고광순(髙光洵)선생과 부하 10여 명은 구식무기에다가 중과부적으로 모두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1907(정미)년 음력 9월 11일 묘시(오전 6시 전후)였다.
적은 연곡사 전각마다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가을바람을 타고 피아골은 물론 지리산을 온통 삼켜 버릴 것같이 거세었다. 광훈은 각종 주요 군부를 지니고 간신히 현장에서 빠져나와 불길 속에 던져버리고는 부근에 몸을 숨겼다.
그는 전투가 잠시 멎자 대장과 동료의 시신들이 불길에 훼손될까 염려하여, 농사꾼을 시켜 시신을 모두 절의 채마밭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 솔가지로 시신을 덮고는 나흘 뒤인 9월 15일 상포를 마련하여 그 자리에 임시로 무덤을 썼다.
다음날인 9월 16일, 구례의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이곳을 찾아 곡하고, 부근의 인부들을 끌어다 봉분을 크게 지은 뒤에 칠언율시 한 수를 남겼다.
哭義兵將鹿川高公戰死(곡의병장녹천고공전사) 의병장 녹천을 애도하노라.
千峯燕谷鬱蒼蒼(천봉연곡울창창) 수많은 연곡의 봉우리 울창한 속에서
小劫虫沙也國殤(소겁충사야국상) 이름 없는 백성들이 나라 위해 싸우다 죽어 갔구나.
戰馬散從禾壟臥(전마산종화농와) 전마는 흩어져 논두렁 따라 널려 있고
神鳥齊下樹陰翔(신조제하수음상)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내려앉을 듯 돌고 있구나.
我曹文字終安用(아조문자종안용) 나 같은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거나!
名祖家聲不可當(명조가성불가당) 이름난 가문의 명성을 따를 길 없나니.
獨向西風彈熱淚(독향서풍탄열루) 가을바람 속에 홀로 뜨거운 눈물 뿌리는데
新墳突兀菊花傍(신분돌올국화방) 국화 옆에 새 무덤 하나 우뚝 솟아났구나.
“나 같은 글만 아는 선비 두었다 무엇에 쓸거나!”하며 매천은 지나날 당신 처사에 대한 부끄러움의 눈물을 뿌렸던 것이다. 이는 녹천이 지난 8월 11일 연곡사에 들어오고 나서 며칠 뒤에,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격문을 하나 써서 더 많은 군사를 모집할 생각으로, 구례에 사는 당대의 명문장가 매천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뜻을 말하고 격문 한 장 초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때 매천은 “오늘날의 정황은 격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니, 오직 더 노력하여 또다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하며 그냥 빈손으로 사람을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막상 녹천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아뿔싸!’ 하고 매천은 자괴감이 들며 자신의 문약(文弱)을 부끄러워한 것이다. 그런 매천도 삼년 뒤에 경술국치를 당하고는 더 이상 ‘글만 아는 선비’가 될 수만은 없어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녹천의 뒤를 따라 자결로 순절하였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이 나라가 망하고 말았구나.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고 옛일 돌아보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글을 아는 선비 노릇 어렵고 힘들구나!
- 절명시 네 수 중 제3수
1962년, 정부에서는 의병장 고광순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참고로 하여 되도록 알기쉽게 가다듬어 썼습니다.
*출처 : 이름 없는 백성들이 나라 위해 싸우다 죽어 갔구나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