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계(髙仁繼)선생의 월봉문집(月峯文集)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0-11-11 22:19
조회
5074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兵火를 거치는 동안 散逸되어 詩稿 몇 권만 家藏되어 왔다. 증손 髙漢翔, 현손 髙師健이 家藏草稿를 바탕으로 聞喜(聞慶)의 宗人 집에서 얻은 書와 士友의 문집에서 찾은 祭文, 行狀 등의 글을 합하여 蒼雪齋 權斗經(1654~1725)의 校正을 거쳐 6책으로 편찬하였다.
6세손 秋潭 髙裕(1722~1779)가 저자의 조부인 三溪 髙胤宗(1493~1542), 부친인 溪亭 髙興雲(1523~1582)의 逸稿에 저자의 문집을 합하여 祖子孫 3世의 遺集을 함께 간행하려고 저자의 문집 간행을 미루어 두었다.
그뒤 7세손 髙夢贊이 1856년에 宗從孫 髙宅龍과 저자의 문집을 간행하려고 舊本의 詩 2책과 文 2책을 다시 교정하여 각각 1책으로 줄이고 附錄까지 포함하여 5권 2책으로 再編하였다. 이때 저자의 中年 이후부터 졸하기 전까지의 기록인 「家藏日錄」은 분량이 많아 제외되었다. 고몽찬은 1858년 겨울에 문집의 편찬을 마치고 淨本을 만들었는데, 고몽찬이 지은 발문에, “待來春爲印出計”라고 한 점으로 보아, 저자의 문집은 1859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초간본》 이 본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晩松D1-A1939),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장서각(4-6361, D3B-2210), 성균관대학교 존경각(檀汕D3B-814)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7세손 髙夢贊이 1859년경에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洪相民 撰), 跋(權斗寅ㆍ權斗經ㆍ蔡獻徵ㆍ李彙載ㆍ髙裕ㆍ髙夢贊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서는 5권 2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洪相民이 지은 서문과 목록이 있다. 권1~2는 詩, 권3~4는 文, 권5는 附錄이다.
권1에는 17세 때인 1580년에 지은〈次贈龍宮倅李渾成〉을 비롯하여 83세 때인 1646년에 지은〈挽洪無住〉까지 107제의 시가 혼재되어 있다. 鄭經世, 全湜, 曺友仁, 洪鎬, 金尙憲을 전송하는 送詩, 李㙉, 李埈, 鄭允諧, 申楫, 李憘, 洪思古, 黃時榦, 金聲遠, 李憺, 全命龍에게 화답한 贈詩, 鄭經世, 髙尙顔, 李埈, 趙靖, 柳袗, 洪鎬, 鄭彦宏, 康復誠, 鄭杺을 애도하는 挽詩가 있다. 이 밖에 〈南歸道中〉은 1611년 예조 낭청에 의망할 테니 한번 만나자고 한 李爾瞻의 제의를 거부하고 낙향하면서 지은 것이며, 〈聞三學士被禍感而有作〉은 병자호란 때 斥和를 주장하다가 瀋陽에 끌려간 洪翼漢, 尹集, 吳達濟가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지은 것이다.
권2에는 81제의 시가 실려 있는데 첫머리의〈過鳥東關〉 이하 모두 湖中雜詠이다. 저자가 振威, 公州, 扶餘, 結城, 洪州, 唐津, 沔川, 定山, 溫陽, 天安, 稷山 등 湖西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지은 紀行詩가 대부분이며, 이때 만난 사람들과 수창하거나 지어 준 시, 이 지역의 명승 고적, 東軒, 樓亭, 驛站에 대한 次韻詩가 많다. 이 중〈次扶餘落花巖韻〉과 〈次皐蘭寺韻〉은 百濟의 멸망과 함께 낙화암과 고란사만 덩그렇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그 당시 成忠의 계책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낸 시이다.
권3은 書 33편이다. 25세 때인 1588년부터 73세 때인 1636년까지 柳成龍(2), 金誠一(1), 李德馨(1), 張顯光(1), 鄭經世(2), 金尙容(1), 金尙憲(1), 金長生(1), 李埈(2), 姜紳(1), 閔士尙(1), 李聖求(1), 李好閔(1), 金尙宓(1), 全湜(2), 趙靖(1), 洪鎬(2), 任叔英(1), 黃時幹(2), 申楫(1), 金遠振(3), 全命龍(3), 髙尙顔(1)에게 보낸 것이다. 유성룡에게 1597년에 올린 편지는 영남에 군량미가 부족하여 明軍의 동원도 어려운 실정이므로 백성들에게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곡식을 바치도록 권면해 달라는 내용이다. 김상헌에게 보낸 편지는 斥和를 주장하다가 청나라로 잡혀가는 김상헌의 행동을 장한 것으로 치하하고, 이에 반해 자신은 胡亂 때 남한산성으로 어가를 호종하지 못하였고 인조가 항복한 날에 죽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내용이다.
권4는 祭文 10편, 序 2편, 墓誌 2편, 墓碣 2편, 行錄 4편이다. 제문은 柳成龍, 鄭經世, 柳袗, 李埈, 趙靖, 全湜 등에 대한 것이며, 序는「開城髙氏世譜」의 서문 등이다. 묘지는 부친 高興雲과 생부 髙慶雲의 것이며, 묘갈은 장인 蔡有孚의 墓表와 부친 高興雲의 묘갈이다. 행록은 趙靖과 黃時榦의 行蹟, 조부 髙胤宗과 부친 髙興雲의 行錄이다.
권5는 부록이다. 洪汝河가 지은 行狀, 李敏求가 지은 墓碑銘, 近嵒書堂 儒生ㆍ道南書院 儒生 등이 지은 祭文, 李增曄이 지은 孝谷書院의 奉安文과 常享祝文, 柳致明이 지은 〈竹洞里社奉安文〉과 常享祝文이 있다. 이어 權斗寅, 權斗經, 蔡獻徵, 李彙載가 지은 跋文이 있다.
권미에는 6세손 髙裕와 7세손 髙夢贊이 지은 발문이 실려 있다.
저자의 시문은 兵火를 거치는 동안 散逸되어 詩稿 몇 권만 家藏되어 왔다. 증손 髙漢翔, 현손 髙師健이 家藏草稿를 바탕으로 聞喜(聞慶)의 宗人 집에서 얻은 書와 士友의 문집에서 찾은 祭文, 行狀 등의 글을 합하여 蒼雪齋 權斗經(1654~1725)의 校正을 거쳐 6책으로 편찬하였다.
6세손 秋潭 髙裕(1722~1779)가 저자의 조부인 三溪 髙胤宗(1493~1542), 부친인 溪亭 髙興雲(1523~1582)의 逸稿에 저자의 문집을 합하여 祖子孫 3世의 遺集을 함께 간행하려고 저자의 문집 간행을 미루어 두었다.
그뒤 7세손 髙夢贊이 1856년에 宗從孫 髙宅龍과 저자의 문집을 간행하려고 舊本의 詩 2책과 文 2책을 다시 교정하여 각각 1책으로 줄이고 附錄까지 포함하여 5권 2책으로 再編하였다. 이때 저자의 中年 이후부터 졸하기 전까지의 기록인 「家藏日錄」은 분량이 많아 제외되었다. 고몽찬은 1858년 겨울에 문집의 편찬을 마치고 淨本을 만들었는데, 고몽찬이 지은 발문에, “待來春爲印出計”라고 한 점으로 보아, 저자의 문집은 1859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초간본》 이 본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晩松D1-A1939),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장서각(4-6361, D3B-2210), 성균관대학교 존경각(檀汕D3B-814)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7세손 髙夢贊이 1859년경에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洪相民 撰), 跋(權斗寅ㆍ權斗經ㆍ蔡獻徵ㆍ李彙載ㆍ髙裕ㆍ髙夢贊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서는 5권 2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洪相民이 지은 서문과 목록이 있다. 권1~2는 詩, 권3~4는 文, 권5는 附錄이다.
권1에는 17세 때인 1580년에 지은〈次贈龍宮倅李渾成〉을 비롯하여 83세 때인 1646년에 지은〈挽洪無住〉까지 107제의 시가 혼재되어 있다. 鄭經世, 全湜, 曺友仁, 洪鎬, 金尙憲을 전송하는 送詩, 李㙉, 李埈, 鄭允諧, 申楫, 李憘, 洪思古, 黃時榦, 金聲遠, 李憺, 全命龍에게 화답한 贈詩, 鄭經世, 髙尙顔, 李埈, 趙靖, 柳袗, 洪鎬, 鄭彦宏, 康復誠, 鄭杺을 애도하는 挽詩가 있다. 이 밖에 〈南歸道中〉은 1611년 예조 낭청에 의망할 테니 한번 만나자고 한 李爾瞻의 제의를 거부하고 낙향하면서 지은 것이며, 〈聞三學士被禍感而有作〉은 병자호란 때 斥和를 주장하다가 瀋陽에 끌려간 洪翼漢, 尹集, 吳達濟가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지은 것이다.
권2에는 81제의 시가 실려 있는데 첫머리의〈過鳥東關〉 이하 모두 湖中雜詠이다. 저자가 振威, 公州, 扶餘, 結城, 洪州, 唐津, 沔川, 定山, 溫陽, 天安, 稷山 등 湖西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지은 紀行詩가 대부분이며, 이때 만난 사람들과 수창하거나 지어 준 시, 이 지역의 명승 고적, 東軒, 樓亭, 驛站에 대한 次韻詩가 많다. 이 중〈次扶餘落花巖韻〉과 〈次皐蘭寺韻〉은 百濟의 멸망과 함께 낙화암과 고란사만 덩그렇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그 당시 成忠의 계책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낸 시이다.
권3은 書 33편이다. 25세 때인 1588년부터 73세 때인 1636년까지 柳成龍(2), 金誠一(1), 李德馨(1), 張顯光(1), 鄭經世(2), 金尙容(1), 金尙憲(1), 金長生(1), 李埈(2), 姜紳(1), 閔士尙(1), 李聖求(1), 李好閔(1), 金尙宓(1), 全湜(2), 趙靖(1), 洪鎬(2), 任叔英(1), 黃時幹(2), 申楫(1), 金遠振(3), 全命龍(3), 髙尙顔(1)에게 보낸 것이다. 유성룡에게 1597년에 올린 편지는 영남에 군량미가 부족하여 明軍의 동원도 어려운 실정이므로 백성들에게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곡식을 바치도록 권면해 달라는 내용이다. 김상헌에게 보낸 편지는 斥和를 주장하다가 청나라로 잡혀가는 김상헌의 행동을 장한 것으로 치하하고, 이에 반해 자신은 胡亂 때 남한산성으로 어가를 호종하지 못하였고 인조가 항복한 날에 죽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내용이다.
권4는 祭文 10편, 序 2편, 墓誌 2편, 墓碣 2편, 行錄 4편이다. 제문은 柳成龍, 鄭經世, 柳袗, 李埈, 趙靖, 全湜 등에 대한 것이며, 序는「開城髙氏世譜」의 서문 등이다. 묘지는 부친 高興雲과 생부 髙慶雲의 것이며, 묘갈은 장인 蔡有孚의 墓表와 부친 高興雲의 묘갈이다. 행록은 趙靖과 黃時榦의 行蹟, 조부 髙胤宗과 부친 髙興雲의 行錄이다.
권5는 부록이다. 洪汝河가 지은 行狀, 李敏求가 지은 墓碑銘, 近嵒書堂 儒生ㆍ道南書院 儒生 등이 지은 祭文, 李增曄이 지은 孝谷書院의 奉安文과 常享祝文, 柳致明이 지은 〈竹洞里社奉安文〉과 常享祝文이 있다. 이어 權斗寅, 權斗經, 蔡獻徵, 李彙載가 지은 跋文이 있다.
권미에는 6세손 髙裕와 7세손 髙夢贊이 지은 발문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