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선(髙光善) 자(字)가 원여(元汝), 호(號)는 현와(弦窩)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6:29
조회
254
1855-1934 자(字)가 원여(元汝), 호(號)는 현와(弦窩), 이름은 광선,
조선조에 운이 문과 좌랑으로 기묘명현이었으며, 맹영은 문과(文科) 부제학이다. 경명은 제봉선생으로 시호(諡號)가 충렬이고, 충렬공의 아들 종후는 임피현감이니 모두 선생의 이름있는 조상(祖上)들이다. 고조(高祖) 시풍(時豊)은 통덕랑(通德郞)이고, 증조(曾祖)는 공진(公鎭)이며, 조부(祖父)는 제열(濟說)이다. 아버지는 호은(湖隱) 박주(璞柱)이며, 어머니는 행주기씨(幸州奇氏) 우진(禹鎭)의 딸이다.
1855년 철종(哲宗) 6년 (을묘) 12월 23일 광주 복촌(復村)집에서 출생(出生)했다. 모습이 민첩(敏捷)하고 단정(端正)했다.
1862년 철종(哲宗) 13년 (임술) 8세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송독(誦讀)에 능하여 칭찬(稱讚)을 받았다.
1864년 고종(高宗) 1년 (갑자) 10세 모친상을 당하고 곡하고 슬퍼하기를 어른처럼 하였다. 세 살짜리 동생을 보살피고 계모 광산 김씨를 친모(親母)처럼 섬기니 종족(宗族)과 마을 사람들이 칭송(稱頌)했다. 선생(先生)은 덕암 나도규 문하(門下)에 나아가 제자(弟子)되기를 청하고 수학(受學)하면서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그리고 노사 기정진의 문하(門下)에도 출입(出入)하면서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깊은 뜻과 일용(日用)의 예절(禮節)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부지런히 질문하여 깨우쳤으므로 노사선생 또한 기특하게 여기고 성실(成實)하게 지도하였다.
성격(性格)은 온유(溫柔)하였으나 옳지 않은 것을 보면 용감(勇敢)하게 고쳤으므로 노사선생도 이를 장하게 여겼다. 부친상(父親喪)을 먼저 당하고 모친상을 당하게 되자 상례(喪禮)를 오로지 법대로 지켰으며 음식(飮食)을 절제(切除)하고 슬픔을 다했다.
1934년 (갑술) 80세 이질에 걸려 신음하던중 12월 25일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沐浴)하고 새옷을 갈아 입었다. 자식들과 조카들이 본집으로 옮기고자 했으나 듣지 않고 다음날 현와정사(弦窩精舍)에서 운명(運命)하였다.
1935년 (을해) 1월 20일 정사의 남쪽 산록 사좌원(巳坐原)에 안장(安葬)했다.
조선조에 운이 문과 좌랑으로 기묘명현이었으며, 맹영은 문과(文科) 부제학이다. 경명은 제봉선생으로 시호(諡號)가 충렬이고, 충렬공의 아들 종후는 임피현감이니 모두 선생의 이름있는 조상(祖上)들이다. 고조(高祖) 시풍(時豊)은 통덕랑(通德郞)이고, 증조(曾祖)는 공진(公鎭)이며, 조부(祖父)는 제열(濟說)이다. 아버지는 호은(湖隱) 박주(璞柱)이며, 어머니는 행주기씨(幸州奇氏) 우진(禹鎭)의 딸이다.
1855년 철종(哲宗) 6년 (을묘) 12월 23일 광주 복촌(復村)집에서 출생(出生)했다. 모습이 민첩(敏捷)하고 단정(端正)했다.
1862년 철종(哲宗) 13년 (임술) 8세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송독(誦讀)에 능하여 칭찬(稱讚)을 받았다.
1864년 고종(高宗) 1년 (갑자) 10세 모친상을 당하고 곡하고 슬퍼하기를 어른처럼 하였다. 세 살짜리 동생을 보살피고 계모 광산 김씨를 친모(親母)처럼 섬기니 종족(宗族)과 마을 사람들이 칭송(稱頌)했다. 선생(先生)은 덕암 나도규 문하(門下)에 나아가 제자(弟子)되기를 청하고 수학(受學)하면서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그리고 노사 기정진의 문하(門下)에도 출입(出入)하면서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깊은 뜻과 일용(日用)의 예절(禮節)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부지런히 질문하여 깨우쳤으므로 노사선생 또한 기특하게 여기고 성실(成實)하게 지도하였다.
성격(性格)은 온유(溫柔)하였으나 옳지 않은 것을 보면 용감(勇敢)하게 고쳤으므로 노사선생도 이를 장하게 여겼다. 부친상(父親喪)을 먼저 당하고 모친상을 당하게 되자 상례(喪禮)를 오로지 법대로 지켰으며 음식(飮食)을 절제(切除)하고 슬픔을 다했다.
1934년 (갑술) 80세 이질에 걸려 신음하던중 12월 25일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沐浴)하고 새옷을 갈아 입었다. 자식들과 조카들이 본집으로 옮기고자 했으나 듣지 않고 다음날 현와정사(弦窩精舍)에서 운명(運命)하였다.
1935년 (을해) 1월 20일 정사의 남쪽 산록 사좌원(巳坐原)에 안장(安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