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후(髙因厚)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6:23
조회
294
1561(명종 16)∼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자는 선건(善健), 호는 학봉(鶴峯). 의병장 경명(敬命)의 아들이며, 의병장 종후(從厚)의 아우이다.
1577년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學諭)에 이어 승문원정자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관군을 이끌고 북상, 공주에 이르러 선조가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 귀향시켰다.
이때 광주의 향리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이들을 다시 모아 형 종후와 함께 수원에 유진(留陣)하고 있는 정윤우(丁允祐)에게 인계하고 행재소로 가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귀향중에 북상중인 아버지의 의병 본진과 태인(泰仁)에서 합류하였다.
의병이 여산(礪山)에 이르러 황간(黃澗) 영동(永同)의 왜적이 장차 전라도로 침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금산으로 향하였다. 금산에서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합세하여 왜적을 방어하기로 하였으나, 왜적이 침입하자 관군이 먼저 붕괴되고, 이에 따라 의병마저 무너져 아버지 경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의열(毅烈)이다.
1577년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學諭)에 이어 승문원정자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관군을 이끌고 북상, 공주에 이르러 선조가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 귀향시켰다.
이때 광주의 향리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이들을 다시 모아 형 종후와 함께 수원에 유진(留陣)하고 있는 정윤우(丁允祐)에게 인계하고 행재소로 가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귀향중에 북상중인 아버지의 의병 본진과 태인(泰仁)에서 합류하였다.
의병이 여산(礪山)에 이르러 황간(黃澗) 영동(永同)의 왜적이 장차 전라도로 침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금산으로 향하였다. 금산에서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합세하여 왜적을 방어하기로 하였으나, 왜적이 침입하자 관군이 먼저 붕괴되고, 이에 따라 의병마저 무너져 아버지 경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의열(毅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