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王建)과 고건(髙建)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2-09-10 23:57
조회
3987
왕건(王建)과 고건(髙建)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이름이 외자다. 한자 이름도 같다. 두 사람 모두 세울건(建)을 쓰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또 훌륭한 아버지가 있었다는 점이 같은 점이다.
먼저 왕건의 아버지 왕륭을 살펴보자. 왕건의 아버지는 어느 날 꿈에 어떤 미인을 만나 부부가 될 것을 약속했다.
꿈을 깨고 송악산으로 가는 길에 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바로 꿈에서 본 여자였다. 그래서 그녀와 혼인한다. 사람들은 왕륭이 꿈에서 보았다 하여 그녀를 몽부인이라고 불렀다.
왕륭은 송악산 남쪽 기슭에 신혼살림을 꾸렸다. 어느 날 이 집에 도선스님이 찾아왔다. 도선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풍수지리법을 익힌 후 귀국하던 길이었다.
도선은 왕륭의 집 앞을 지나면서 중얼거렸다. <어허,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 삼을 심었는가> 이 말을 들은 왕륭은 급히 도선의 뒤를 쫓았다.
그러자 도선이 말했다.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을 것입니다. 아이를 얻으면 이름을 왕건이라 하십시오>
도선은 봉투를 만들어 겉에 간단한 글귀를 적어 넣었다. <삼가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주인을 당신에게 드리노라>
왕륭은 도선이 준 봉투를 받아 백 번 절하고 그가 시킨 대로 집을 지었다. 그 달부터 아내에게 태기가 보였고 열 달 뒤에 아이를 낳았다. 왕륭은 도선의 말대로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 지었다. 이때가 877년 1월이다.
왕건이 17세 때 도선이 다시 송악을 찾아온다. <당신은 혼란한 때를 맞추어 하늘이 정한 명당에서 태어났습니다. 삼국 말세의 창생들은 당신이 구제하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후 도선은 왕건에게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법,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고 적당한 시기를 택하는 법, 산천의 형세를 보고 이치를 헤아리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왕건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건하게 된다.
한편 고건의 아버지는 한국 철학의 대가였던 청송 고형곤이다.
청송은 1906년 전북 옥구군 (현재는 군산시) 임피면 월하리에서 3남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제주고씨 집안은 이곳에서 8백년 째 대를 이어온 집안이었다. 그는 5세부터 14세까지 서당에 나가 한학을 익혔다. 14세의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6년 과정을 1년 반 만에 마치고 당시 일류 학교였던 이리농림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에서도 5년 과정을 3년에 끝내고 경성제국대학에 합격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철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해방이 되고 1947년 서울대 문리대로 자리를 옮겨 1958년까지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959년 53세 되던 해 전북대 총장으로 임명된 청송은 학교 행정에 정열을 바쳤으나 4.19 혁명과 함께 고난을 겪는다.
1963년에는 6대 총선에서 군산. 옥구지역 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정치에 흥미를 잃은 그는 정치와 이별하고 철학 공부에 매진한다.
1980년대 들어 정읍 내장산에서 평생의 꿈이었던 독거생활에 들어갔다. 7평짜리 집에서 11년간 홀로 기거하며 원효와 선 공부에 주력하다 지난 2004년 6월에 생을 마감했다. 언론계와 정계. 학계를 두루 거치면서 많은 에피소드를 남긴 청송은 3남2녀를 두었다.
첫째는 석윤, 둘째는 경, 셋째는 건이다. 경이와 건이 두 아들을 소재로 연희전문 동료였던 이양하 전 서울대 교수가 쓴 수필 <경이 건이>는 1975년부터 1983년까지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
1977년 고건이 재상에 오르자 청송이 아들에게 내린 <목민관 수칙 3계명>이 화제가 됐다. 그것은 이미 1961년 고건이 행정고시에 합격, 사무관으로 나설 때 공직자세 3가지를 엄명한 내용이다.
<남의 돈을 받지 마라>
<술 잘 마신다는 소문을 내지 마라>
<누구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마라>가 바로 유명한 <청송삼계>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태조 왕건에게는 훌륭한 경세가였던 아버지가 있었다. 왕륭은 아들 왕건이 대망을 실현하도록 길잡이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고건 뒤에는 아버지 고형곤이 있었다. 큰 인물 배후에는 철학과 경륜을 겸비한 스승이 있기 마련이다.
먼저 왕건의 아버지 왕륭을 살펴보자. 왕건의 아버지는 어느 날 꿈에 어떤 미인을 만나 부부가 될 것을 약속했다.
꿈을 깨고 송악산으로 가는 길에 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바로 꿈에서 본 여자였다. 그래서 그녀와 혼인한다. 사람들은 왕륭이 꿈에서 보았다 하여 그녀를 몽부인이라고 불렀다.
왕륭은 송악산 남쪽 기슭에 신혼살림을 꾸렸다. 어느 날 이 집에 도선스님이 찾아왔다. 도선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풍수지리법을 익힌 후 귀국하던 길이었다.
도선은 왕륭의 집 앞을 지나면서 중얼거렸다. <어허,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 삼을 심었는가> 이 말을 들은 왕륭은 급히 도선의 뒤를 쫓았다.
그러자 도선이 말했다.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을 것입니다. 아이를 얻으면 이름을 왕건이라 하십시오>
도선은 봉투를 만들어 겉에 간단한 글귀를 적어 넣었다. <삼가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주인을 당신에게 드리노라>
왕륭은 도선이 준 봉투를 받아 백 번 절하고 그가 시킨 대로 집을 지었다. 그 달부터 아내에게 태기가 보였고 열 달 뒤에 아이를 낳았다. 왕륭은 도선의 말대로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 지었다. 이때가 877년 1월이다.
왕건이 17세 때 도선이 다시 송악을 찾아온다. <당신은 혼란한 때를 맞추어 하늘이 정한 명당에서 태어났습니다. 삼국 말세의 창생들은 당신이 구제하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후 도선은 왕건에게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법,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고 적당한 시기를 택하는 법, 산천의 형세를 보고 이치를 헤아리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왕건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건하게 된다.
한편 고건의 아버지는 한국 철학의 대가였던 청송 고형곤이다.
청송은 1906년 전북 옥구군 (현재는 군산시) 임피면 월하리에서 3남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제주고씨 집안은 이곳에서 8백년 째 대를 이어온 집안이었다. 그는 5세부터 14세까지 서당에 나가 한학을 익혔다. 14세의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6년 과정을 1년 반 만에 마치고 당시 일류 학교였던 이리농림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에서도 5년 과정을 3년에 끝내고 경성제국대학에 합격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철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해방이 되고 1947년 서울대 문리대로 자리를 옮겨 1958년까지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959년 53세 되던 해 전북대 총장으로 임명된 청송은 학교 행정에 정열을 바쳤으나 4.19 혁명과 함께 고난을 겪는다.
1963년에는 6대 총선에서 군산. 옥구지역 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정치에 흥미를 잃은 그는 정치와 이별하고 철학 공부에 매진한다.
1980년대 들어 정읍 내장산에서 평생의 꿈이었던 독거생활에 들어갔다. 7평짜리 집에서 11년간 홀로 기거하며 원효와 선 공부에 주력하다 지난 2004년 6월에 생을 마감했다. 언론계와 정계. 학계를 두루 거치면서 많은 에피소드를 남긴 청송은 3남2녀를 두었다.
첫째는 석윤, 둘째는 경, 셋째는 건이다. 경이와 건이 두 아들을 소재로 연희전문 동료였던 이양하 전 서울대 교수가 쓴 수필 <경이 건이>는 1975년부터 1983년까지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
1977년 고건이 재상에 오르자 청송이 아들에게 내린 <목민관 수칙 3계명>이 화제가 됐다. 그것은 이미 1961년 고건이 행정고시에 합격, 사무관으로 나설 때 공직자세 3가지를 엄명한 내용이다.
<남의 돈을 받지 마라>
<술 잘 마신다는 소문을 내지 마라>
<누구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마라>가 바로 유명한 <청송삼계>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태조 왕건에게는 훌륭한 경세가였던 아버지가 있었다. 왕륭은 아들 왕건이 대망을 실현하도록 길잡이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고건 뒤에는 아버지 고형곤이 있었다. 큰 인물 배후에는 철학과 경륜을 겸비한 스승이 있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