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주(髙鼎柱) 구한말의 애국계몽운동가.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세움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8:07
조회
575
1863~1933 호(號)는 춘강(春崗)
구한말의 애국계몽운동가로 자는 보현(寶鉉), 호는 춘강(春崗)이며 전남 담양 창평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참봉 고제두(髙濟斗)이고 모친은 전주이씨로 돈녕부 도정(都正) 이태영(李泰榮)의 딸이며, 5세 때 큰아버지인 선공감 감역(監役) 고제승(髙濟升)의 양자로 들어갔다. 6세 때 양부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3세 때부터 창평읍에서 5리쯤 떨어진 월정(月亭, 현 상월정)에서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19세인 1881년(고종 18) 한장석(韓章錫)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1883년에는 성대영(成大泳)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미 이때 그의 학문이 높은 수준에 이르러 성대영이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188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891년 문과에 합격하였다.
그 해 동생인 고하주(髙廈柱)도 진사시에 합격하여 같이 금의환향하였다.1893년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어 승정원 주서로 입직당호(入直堂戶)하였다. 1895년 고종이 관심을 보이며 “고경명이 몇 대 선조인가 ” 하고 묻고 선물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1897년(광무 1) 장남 고광일(髙光馹)이 효릉참봉에 임명되었다. 1898년 종묘축관(宗廟祝官)에 선출되었으며 1899년 홍문관 시독을 역임하고 품계가 정6품 승훈랑(承訓郞)에 올랐다. 이 때 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은데도 오히려 조정 대신들이 외세를 등에 업고 개인의 야욕을 채우기에 혈안이 되자 고정주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을 강조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그는 상벌을 명백히 하여 부패한 관리를 추방하고 산택(山澤)의 이익을 개발하고 재원을 모아 군사력을 증대하여 국가의 근본을 굳건하게 함으로써 외세의 침입을 물리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0년과 1901년에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달아 당하였으며 1903년에는 차남 고광준(髙光駿)을 중국에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1905년 홍문관 시독, 비서감랑, 예식원 상례 등을 역임하고 규장각 직각 겸 황자전독(皇子典讀)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비서감승(秘書監丞)이 되었다. 이 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복궐상소(伏闕上疏)를 올렸는데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약을 맺은 부신(部臣)들은 매국적(賣國賊)입니다. 나라사람들이 모두 죽이라고 말하는데 죽일 수 없다면 어디 나라에 형정(刑政)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종사를 위해서 죽겠다는 뜻을 견고히 지켜 강제로 조인된 조약을 인준하지 않고 조인한 적들을 엄한 규율로 다스리고 그들에게 붙은 놈들을 모두 배척하고 시무를 알고 절의가 높은 자들은 관직에 임명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상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자 크게 탄식하며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 이듬해 고향 창평으로 낙향하여 인산(仁山) 터에 정자를 짓고 녹천정(綠泉亭)이라 이름 붙이고 거처하면서 애국계몽운동, 특히 신교육운동에 투신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 해 월정을 수리하여 영학숙(英學塾)을 세우고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곳에서는 중국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 고광준, 그의 사위인 김성수(金性洙), 그리고 송진우(宋鎭禹), 현준호(玄俊鎬), 김시중(金時中) 등이 수학하였다.1907년에는 사돈인 김경중(김성수의 부친)과 함께 호남학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 1908년 호남학회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세우고 신교육운동에 전념하였다.
창흥의숙에서는 영학숙에서 공부했던 사람들과 김병로(金炳魯) 등 50여 명의 학생들이 한문,국사,영어,산술 등 신학문을 배웠다. 창흥의숙은 얼마 뒤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창흥학교라는 공식교육기관으로 변화하였으며 고정주는 초대 교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항상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고금(古今)에 박식하고 시의(時宜)에 통달하여 큰 변화를 놓치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함께 하면서 도(道)를 따르는 뜻에 맞출 것을 강조하고 만약 옛 것에 집착하여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하면 바로 구차한 선비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창흥학교는 다시 창평보통학교로 바뀌어 호남지역의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고정주는 두문불출하였으며 이듬해 육휴당(六休堂)을 세워 모든 가사를 그곳에 처리하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나라 잃은 설움을 시와 글 속에 남겼다. 그의 스승인 한장석은 유신환(兪莘煥)의 문인이었다.
유신환과 그의 문인들은 정치적 실천을 중요시하여 정계 진출에 적극적이었으며 실제로 상당수의 인물이 중앙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적으로는 경세학(經世學)을 강조하고 시무(時務)를 매우 중요시하여 전정(田政),군정(軍政 )등 삼정의 개혁, 청과의 공동운명론에 입각한 국방강화론을 주장하였다. 고정주의 상소문을 보면 재정 확충과 군사력 증대를 주장하는 등 유신환의 학문적 영향이 적지 않게 보인다.
또한 관직을 그만두고 인재를 키우는 데 힘쓴 1900년대에는 유학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신문물을 도입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을 주장하는 동도서기론적인 입장으로 발전하였으며 특히 청을 통한 신문물의 도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바탕을 둔 온건개화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특성이 그로 하여금 의병활동보다는 신교육운동 등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게 했던 것이다.
구한말의 애국계몽운동가로 자는 보현(寶鉉), 호는 춘강(春崗)이며 전남 담양 창평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참봉 고제두(髙濟斗)이고 모친은 전주이씨로 돈녕부 도정(都正) 이태영(李泰榮)의 딸이며, 5세 때 큰아버지인 선공감 감역(監役) 고제승(髙濟升)의 양자로 들어갔다. 6세 때 양부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3세 때부터 창평읍에서 5리쯤 떨어진 월정(月亭, 현 상월정)에서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19세인 1881년(고종 18) 한장석(韓章錫)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1883년에는 성대영(成大泳)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미 이때 그의 학문이 높은 수준에 이르러 성대영이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188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891년 문과에 합격하였다.
그 해 동생인 고하주(髙廈柱)도 진사시에 합격하여 같이 금의환향하였다.1893년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어 승정원 주서로 입직당호(入直堂戶)하였다. 1895년 고종이 관심을 보이며 “고경명이 몇 대 선조인가 ” 하고 묻고 선물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1897년(광무 1) 장남 고광일(髙光馹)이 효릉참봉에 임명되었다. 1898년 종묘축관(宗廟祝官)에 선출되었으며 1899년 홍문관 시독을 역임하고 품계가 정6품 승훈랑(承訓郞)에 올랐다. 이 때 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은데도 오히려 조정 대신들이 외세를 등에 업고 개인의 야욕을 채우기에 혈안이 되자 고정주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을 강조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그는 상벌을 명백히 하여 부패한 관리를 추방하고 산택(山澤)의 이익을 개발하고 재원을 모아 군사력을 증대하여 국가의 근본을 굳건하게 함으로써 외세의 침입을 물리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0년과 1901년에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달아 당하였으며 1903년에는 차남 고광준(髙光駿)을 중국에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1905년 홍문관 시독, 비서감랑, 예식원 상례 등을 역임하고 규장각 직각 겸 황자전독(皇子典讀)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비서감승(秘書監丞)이 되었다. 이 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복궐상소(伏闕上疏)를 올렸는데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약을 맺은 부신(部臣)들은 매국적(賣國賊)입니다. 나라사람들이 모두 죽이라고 말하는데 죽일 수 없다면 어디 나라에 형정(刑政)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종사를 위해서 죽겠다는 뜻을 견고히 지켜 강제로 조인된 조약을 인준하지 않고 조인한 적들을 엄한 규율로 다스리고 그들에게 붙은 놈들을 모두 배척하고 시무를 알고 절의가 높은 자들은 관직에 임명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상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자 크게 탄식하며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 이듬해 고향 창평으로 낙향하여 인산(仁山) 터에 정자를 짓고 녹천정(綠泉亭)이라 이름 붙이고 거처하면서 애국계몽운동, 특히 신교육운동에 투신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 해 월정을 수리하여 영학숙(英學塾)을 세우고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곳에서는 중국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 고광준, 그의 사위인 김성수(金性洙), 그리고 송진우(宋鎭禹), 현준호(玄俊鎬), 김시중(金時中) 등이 수학하였다.1907년에는 사돈인 김경중(김성수의 부친)과 함께 호남학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 1908년 호남학회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세우고 신교육운동에 전념하였다.
창흥의숙에서는 영학숙에서 공부했던 사람들과 김병로(金炳魯) 등 50여 명의 학생들이 한문,국사,영어,산술 등 신학문을 배웠다. 창흥의숙은 얼마 뒤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창흥학교라는 공식교육기관으로 변화하였으며 고정주는 초대 교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항상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고금(古今)에 박식하고 시의(時宜)에 통달하여 큰 변화를 놓치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함께 하면서 도(道)를 따르는 뜻에 맞출 것을 강조하고 만약 옛 것에 집착하여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하면 바로 구차한 선비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창흥학교는 다시 창평보통학교로 바뀌어 호남지역의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고정주는 두문불출하였으며 이듬해 육휴당(六休堂)을 세워 모든 가사를 그곳에 처리하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나라 잃은 설움을 시와 글 속에 남겼다. 그의 스승인 한장석은 유신환(兪莘煥)의 문인이었다.
유신환과 그의 문인들은 정치적 실천을 중요시하여 정계 진출에 적극적이었으며 실제로 상당수의 인물이 중앙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적으로는 경세학(經世學)을 강조하고 시무(時務)를 매우 중요시하여 전정(田政),군정(軍政 )등 삼정의 개혁, 청과의 공동운명론에 입각한 국방강화론을 주장하였다. 고정주의 상소문을 보면 재정 확충과 군사력 증대를 주장하는 등 유신환의 학문적 영향이 적지 않게 보인다.
또한 관직을 그만두고 인재를 키우는 데 힘쓴 1900년대에는 유학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신문물을 도입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을 주장하는 동도서기론적인 입장으로 발전하였으며 특히 청을 통한 신문물의 도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바탕을 둔 온건개화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특성이 그로 하여금 의병활동보다는 신교육운동 등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