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순흠(髙順欽)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8:05
조회
350
1893년(고종 30)~ 1977년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자는 자유(自由), 호는 죽암(竹岩). 아버지는 성균관 교수였던 능봉(菱峰) 고성겸(髙性謙, 1856~1899)이며,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고경흠(髙景欽, 1910~?)의 8촌 형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 23-1에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고순흠의 묘가 있다.
고향에서 한문을 익히고 의신학교(義信學校)를 거쳐 1912년 제주공립농업학교(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의 전신)를 제1기로 졸업하였고 1914년 3월에 경성전수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를 나왔다.
1909년에 안희제(安熙濟, 1885~1943)·윤세복(尹世復, 1881~1960)·서상일(徐相日, 1887~1962)·김동삼(金東三, 1878~1937)·신백우(申伯雨, 1888~1962)·신팔균(申八均, 1882~1924) 등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청년 항일운동 단체였던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열(金圭烈, 1893~1968), 황종화(黃鍾和, 1878~1950) 등과 함께 임시정부로부터 「일제의 관공리인 동포에게」, 「포고 제1호, 남녀학생에게」, 「포고 제2호,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 등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 포고문과 격문을 국내에 배포하였다.
또한 1920년 4월에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였던 조선노동공제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해 조선노동공제회의 선언문과 강령 및 헌장의 초안을 양제박(梁濟博)과 함께 담당하였으며, 서무 책임자도 역임하였다.
1924년 3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사상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조선무산자사회연맹을 결성하였으며, 1924년 7월에는 오사카조선노동동맹회, 간사이조선인3·1청년회 및 오사카조선유학생학우회 등 3개 단체와 조선무산자사회연맹 공동으로 ‘조선인문제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조선인여공보호연맹회를 조직해 여공들의 처우 개선과 분쟁해결에 노력하였다.
이와 함께 1928년에는 당시 제주와 오사카 항로를 독점 운영하던 일본 선박업자들이 운임료를 대폭 인상하자 이에 제주도민들이 집회를 열어 운임료 인상의 부당함을 규탄하고, 요금의 인하를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제주도의 상황을 보고 고순흠은 자주운항운동(自主運航運動)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제주항해조합과 기업동맹기선부를 설립하여 일본기선회사의 횡포에 대처하면서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항로에 순길환(順吉丸)을 취항시켰다. 이 당시 기업동맹기선부는 무정부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제주도민의 소비조합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후 광복 이후인 1946년 10월 3일에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 결성되자 박렬(朴烈, 1902~1974)이 중앙 총본부 단장을 맡았으며, 고순흠은 중앙 총본부 의장을 맡았다. 이후 고순흠은 1947년 10월 1일에 재일본조선거류민단 부단장에 피선되어 1949년 6월까지 재임하였다.
[저술 및 작품]
고순흠은 1963년에 영구 귀국한 이후 서예에 몰두해 제주와 부산 등지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목우(木牛) 김문준(金文準, 1894~1936)의 묘표(墓表), 매강 김운배(金沄培, 1899~1934)와 김시성(金時成, 1909~1935) 및 여성 항일운동가 김시숙(金時淑, 1880~1933)의 묘비 등 고향 출신 항일운동가들의 비문은 대부분 고순흠의 글씨이다.
[상훈과 추모]
1963년에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竹岩선생이 獄中에서 쓴 詩
誰憐一栗身 뉘가 이 한 몸 가엾다 하오
我本韓遺民 나는 본디 대한의 백성이노라
鐵窓間日月 옥중에서 세월을 되씹으니
石壁少風塵 감옥안엔 세상풍진이 적어
無學地藏佛 부처님 가르침을 못 배우고도
難忘老母親 늙으신 어머님 잊을 수 없네
蘇武君知否 소무여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其生死後新 이 목숨 죽은뒤 새로와질 것을
-1922. 8. 2 조선노동공제회 활동 중 감옥에서-
자는 자유(自由), 호는 죽암(竹岩). 아버지는 성균관 교수였던 능봉(菱峰) 고성겸(髙性謙, 1856~1899)이며,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고경흠(髙景欽, 1910~?)의 8촌 형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 23-1에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고순흠의 묘가 있다.
고향에서 한문을 익히고 의신학교(義信學校)를 거쳐 1912년 제주공립농업학교(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의 전신)를 제1기로 졸업하였고 1914년 3월에 경성전수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를 나왔다.
1909년에 안희제(安熙濟, 1885~1943)·윤세복(尹世復, 1881~1960)·서상일(徐相日, 1887~1962)·김동삼(金東三, 1878~1937)·신백우(申伯雨, 1888~1962)·신팔균(申八均, 1882~1924) 등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청년 항일운동 단체였던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열(金圭烈, 1893~1968), 황종화(黃鍾和, 1878~1950) 등과 함께 임시정부로부터 「일제의 관공리인 동포에게」, 「포고 제1호, 남녀학생에게」, 「포고 제2호,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 등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 포고문과 격문을 국내에 배포하였다.
또한 1920년 4월에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였던 조선노동공제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해 조선노동공제회의 선언문과 강령 및 헌장의 초안을 양제박(梁濟博)과 함께 담당하였으며, 서무 책임자도 역임하였다.
1924년 3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사상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조선무산자사회연맹을 결성하였으며, 1924년 7월에는 오사카조선노동동맹회, 간사이조선인3·1청년회 및 오사카조선유학생학우회 등 3개 단체와 조선무산자사회연맹 공동으로 ‘조선인문제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조선인여공보호연맹회를 조직해 여공들의 처우 개선과 분쟁해결에 노력하였다.
이와 함께 1928년에는 당시 제주와 오사카 항로를 독점 운영하던 일본 선박업자들이 운임료를 대폭 인상하자 이에 제주도민들이 집회를 열어 운임료 인상의 부당함을 규탄하고, 요금의 인하를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제주도의 상황을 보고 고순흠은 자주운항운동(自主運航運動)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제주항해조합과 기업동맹기선부를 설립하여 일본기선회사의 횡포에 대처하면서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항로에 순길환(順吉丸)을 취항시켰다. 이 당시 기업동맹기선부는 무정부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제주도민의 소비조합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후 광복 이후인 1946년 10월 3일에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 결성되자 박렬(朴烈, 1902~1974)이 중앙 총본부 단장을 맡았으며, 고순흠은 중앙 총본부 의장을 맡았다. 이후 고순흠은 1947년 10월 1일에 재일본조선거류민단 부단장에 피선되어 1949년 6월까지 재임하였다.
[저술 및 작품]
고순흠은 1963년에 영구 귀국한 이후 서예에 몰두해 제주와 부산 등지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목우(木牛) 김문준(金文準, 1894~1936)의 묘표(墓表), 매강 김운배(金沄培, 1899~1934)와 김시성(金時成, 1909~1935) 및 여성 항일운동가 김시숙(金時淑, 1880~1933)의 묘비 등 고향 출신 항일운동가들의 비문은 대부분 고순흠의 글씨이다.
[상훈과 추모]
1963년에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竹岩선생이 獄中에서 쓴 詩
誰憐一栗身 뉘가 이 한 몸 가엾다 하오
我本韓遺民 나는 본디 대한의 백성이노라
鐵窓間日月 옥중에서 세월을 되씹으니
石壁少風塵 감옥안엔 세상풍진이 적어
無學地藏佛 부처님 가르침을 못 배우고도
難忘老母親 늙으신 어머님 잊을 수 없네
蘇武君知否 소무여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其生死後新 이 목숨 죽은뒤 새로와질 것을
-1922. 8. 2 조선노동공제회 활동 중 감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