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수(髙京守)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6:53
조회
317
1916년~1935년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제주공립농업학교 2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1931년은 일제의 황민화 정책이 시작되고 있던 시기였고, 특히 황민화 교육이 강도 높게 실행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조선인 학생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제주공립농업학교 1931년 졸업 예정자 김원요(金源堯)는 교내 행사에서 일황(日皇)의 칙어를 낭독하면 묵념을 하게 되어 있었으나 거부하였다. 또 양두옥(梁斗玉)·신창진(愼昌珍)도 일제의 황민화 교육과 민족적 차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평소 이들을 눈여겨 보던 학교 당국은 1931년 3월 졸업 사정회에서 김원요에게는 제적 처분을, 양두옥과 신창진에게는 유급 처분을 내렸다. 이 조치에 조선인 학생들이 심하게 분개하였다.
1931년 3월 7일 졸업식이 끝난 후 동급생 양치삼(梁致三) 등 9명이 교무실에 들어가 학우들에 대한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였다가 전원 경찰에 구금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경수를 비롯한 동기생들은 격분하였다. 부당 조치가 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므로 교장 관사로 찾아가 따지기로 하고 관사로 갔으나 교장은 외출 중이었다. 동기생들은 교장 부인을 상대로 식민지 교육의 문제점을 따지면서 항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사의 기물을 부수었는데, 마침 교장을 만나기 위하여 왔던 제주도립병원 원장 지바[千葉]가 경찰에 신고하였고, 고경수를 비롯한 홍성옥(洪成玉)·오화국(吳化國)·양공팔(梁公八)은 구속되었다. 고경수는 1931년 8월 3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제주공립농업학교 2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1931년은 일제의 황민화 정책이 시작되고 있던 시기였고, 특히 황민화 교육이 강도 높게 실행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조선인 학생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제주공립농업학교 1931년 졸업 예정자 김원요(金源堯)는 교내 행사에서 일황(日皇)의 칙어를 낭독하면 묵념을 하게 되어 있었으나 거부하였다. 또 양두옥(梁斗玉)·신창진(愼昌珍)도 일제의 황민화 교육과 민족적 차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평소 이들을 눈여겨 보던 학교 당국은 1931년 3월 졸업 사정회에서 김원요에게는 제적 처분을, 양두옥과 신창진에게는 유급 처분을 내렸다. 이 조치에 조선인 학생들이 심하게 분개하였다.
1931년 3월 7일 졸업식이 끝난 후 동급생 양치삼(梁致三) 등 9명이 교무실에 들어가 학우들에 대한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였다가 전원 경찰에 구금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경수를 비롯한 동기생들은 격분하였다. 부당 조치가 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므로 교장 관사로 찾아가 따지기로 하고 관사로 갔으나 교장은 외출 중이었다. 동기생들은 교장 부인을 상대로 식민지 교육의 문제점을 따지면서 항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사의 기물을 부수었는데, 마침 교장을 만나기 위하여 왔던 제주도립병원 원장 지바[千葉]가 경찰에 신고하였고, 고경수를 비롯한 홍성옥(洪成玉)·오화국(吳化國)·양공팔(梁公八)은 구속되었다. 고경수는 1931년 8월 3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