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건(髙宗虔)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6:52
조회
239
1902~1965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1930년 협성청년회가 운영하던 노동 야학에서 제주청년동맹 회원 김두성(金斗性)·김일준(金日準) 등과 함께 마을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31년 1월 15일 일본 도쿄에서 사망한 동향 출신의 항일운동가 한영섭(韓永燮)의 시신이 1월 19일에 도착하자, 제주청년동맹은 동지장(同志葬)으로 치루기로 하였다. 상가(喪家)에 “불평등한 사회를 타도하여 무산계급의 사회를 건설하려 한 그대는 갔지만 그대의 주의(主義), 정신은 동지마다 계승하여 분투할 것이니 고이 진좌하시라”는 만장을 내걸었다.
1월 22일 고종건과 참석자들은 함덕리에서 대흘리 장지까지 상여를 메고 가면서 적기가(赤旗歌)를 부르고 ‘한영섭 만세’를 삼창하였다. 비석의 비문은 송건호(宋健浩)가 짓고, 김진희(金晋熙)가 글자를 새겼다. 비의 표면에는 “동지 적광 한영섭 기념비(同地赤光韓永燮紀念碑)”라고 쓰고, 뒷면에는 “차디찬 흰 빛 밑에 눌린 무리들아 고함쳐 싸우라고 피 흘린 동지였다”고 새겼다.
고종건은 이 일에 참여한 동지 9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31년 8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하였다. 1931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8개월 남짓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1930년 협성청년회가 운영하던 노동 야학에서 제주청년동맹 회원 김두성(金斗性)·김일준(金日準) 등과 함께 마을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31년 1월 15일 일본 도쿄에서 사망한 동향 출신의 항일운동가 한영섭(韓永燮)의 시신이 1월 19일에 도착하자, 제주청년동맹은 동지장(同志葬)으로 치루기로 하였다. 상가(喪家)에 “불평등한 사회를 타도하여 무산계급의 사회를 건설하려 한 그대는 갔지만 그대의 주의(主義), 정신은 동지마다 계승하여 분투할 것이니 고이 진좌하시라”는 만장을 내걸었다.
1월 22일 고종건과 참석자들은 함덕리에서 대흘리 장지까지 상여를 메고 가면서 적기가(赤旗歌)를 부르고 ‘한영섭 만세’를 삼창하였다. 비석의 비문은 송건호(宋健浩)가 짓고, 김진희(金晋熙)가 글자를 새겼다. 비의 표면에는 “동지 적광 한영섭 기념비(同地赤光韓永燮紀念碑)”라고 쓰고, 뒷면에는 “차디찬 흰 빛 밑에 눌린 무리들아 고함쳐 싸우라고 피 흘린 동지였다”고 새겼다.
고종건은 이 일에 참여한 동지 9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31년 8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하였다. 1931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8개월 남짓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