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髙維)(1) 중시조 2세손(世孫), 2대(代) 성주(星主)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6:40
조회
238
고유(문하시중) - 2세손(世孫)
성주공 문하시중 휘 유 중시조 2세(星主公 門下侍中 諱 維 中始祖二世)
고려초기의 문인. 중시조 성주공 諱(휘) 末老(말로)의 장자로서 星主爵(성주작)을 물려받았다.
고려 현종때 文憲公(문헌공) 최충의 문하에서 師事(사사)하여 1045년(靖宗(정종)11년 乙酉(을유))에 南省試(남성시-科擧(과거))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고 다음해에 賓貢(빈공-국빈대우)으로 李作挻(이작연) 榜(방)에 세사람 중에 급제하여 右拾遺(우습유)가 되었다.
1057년(文宗(문종)11년) 中書省(중서성)에서 奏(주)하기를 '공은 탐라국 출신이므로 諫官(간관)으로서는 적합하지 못하니 그의 재주를 아까워 할 것 같으면 다른 벼슬을 除授(제수) 하소소' 하였다. 이렇듯 당시 탐라인의 중앙진출은 많은 제한을 받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 후에 공은 秘書少監(비서소감)으로 임명되었으니 인물이 얼마나 출중하고 비범하였는지 짐작 할 수 있다.
그후 공은 탐라에 돌아와 성주의 직분으로서 1034년(德宗(덕종) 甲戌(갑술)) 9월 고려에 입조하여 靖宗(정종)의 즉위를 축하하고 국가 祭典(제전)인 入關會(입관회)에 宋(송), 東西女眞(동서여진)의 사신과 함께 참석하였으니 이때부터 탐라는 고려의 주요 行事(행사)에 사신과 方物(방물)을 보냈다. 이때 고려에 보내는 탐라의 土産物(토산물)은 橘顆(귤과), 牛黃(우황), 牛角(우각), 牛皮(우피), 榧子(비자),海藻(해조), 龜甲(귀갑)등이 主種(주종)을 이루었다.
고려는 탐라와 처음 交聘(교빙)할 때와는 달리 세월이 지나면서 1년에 한번씩 朝見(조견)함과 동시에 方物(방물)을 바치도록 강요하여 왔다. 이에 공은 고려의 門下省(문하성)을 통하여 탐라의 땅은 메마르고 또한 태풍이나 가뭄 등으로 土産物(토산물)의 수확이 감소될 때가 많으므로 歲貢額(세공액)을 감하여 줄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자 1052년(文宗(문종) 6년 壬辰(임진)) 3월에 고려왕은 탐라의 세공액을 고쳐서 橘子(귤자) 백포로 정하여 주었다.
다음 해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 朝貢(조공)하니 그 답례로 고려는 탐라에 公服(공복), 銀帶(은대), 綵緞(채단), 藥物(약물)등을 보내왔다. 1055년(文宗(문종) 9년 乙未(을미)) 2월에 공은 사신과 수행원을 대동하고 入闕(입궐)하여 태자 冊立(책립)을 축하하고 朝宗館(조종관)에서 왕이 베푼 연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송, 일본, 契丹(계단), 黑水(흑수)등 여러 나라 來獻使節(래헌사절)들도 같이 참석하였으니 탐라성주인 공의 좌석 서열은 세 번째로 각별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공은 인근 諸國(제국)들과 교역을 활발히 전개하여 文物(문물)을 많이 받아드렸고 탐라의 옛 宮城(궁성)을 보수하는 한편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후 공은 왕의 부름을 받고 入朝(입조)하여 다시 벼슬길에 나갔으니, 1057년(文宗(문종) 11년 丁酉(정유))에 秘書少監(비서소감)을 거쳐 東北路兵馬副使(동북로병마부사)가 되었고 1070년(文宗(문종) 24년 庚戌(경술)) 4월에는 兵部侍郞(병부시랑), 左諫議大夫(좌간의대부), 西北路兵馬副使(서북로병마부사)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國子監試(국자감시)의 試官(시관)이 되어 두 과목에 75명을 급제시켰다.
1058년(文宗(문종) 12년 戊戌(무술)) 가을에 고려는 大船(대선)을 만들기 위해 한라산의 목재를 벌채하려 하였으니 이에 공은 門下省(문하성)에 상소하기를 '지난해에도 佛寺(불사)를 창건하느라 한라산의 재목을 많이 벌채한바 있고 탐라인의 노고와 산림 손상이 많으므로 혹시 다른 변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하니 왕은 공의 상소를 받아드려 그 일을 중지하였다. 한편 고려에 가는 朝貢船(조공선)과 일본, 중국 등으로 가는 交易船(교역선)이 여러 차례 태풍 등으로 표류됐다가 돌아오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침몰되어 많은 인명과 재물의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1071년(文宗(문종) 25년 辛亥(신해))에 공은 右僕射(우복사), 門下侍中(문하시중)이 되었으니 탐라 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고려의 臺官(대관)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탐라국 王孫(왕손)으로서 명문의 家統(가통)을 이어 받은 후손들이 활발히 진출하여 높은 벼슬을 하였고 한편으로는 탐라성주로서 많은 治蹟(치적)을 남겼다.
▷ 문하시중(門下侍中)
나라의 모든 정치를 총괄하는 대신이다. 982년(성종 1) 내의성(內議省)을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개편하면서 내사령(內史令)과 함께 처음으로 두었다. 1061년(문종 15) 관제개편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이름을 바꾸고, 1275년(충렬왕 1) 중서문하성 ·상서성(尙書省)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고침에 따라 문하시랑 대신 좌첨의중찬(左僉議中贊) ·우첨의중찬(右僉議中贊)으로 나누어 각 1명씩 두었다.
그 후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한 적이 있으나 곧 중찬으로 복구, 1308년 첨의부가 도첨의부(都僉議府)가 됨으로써 정승(政丞)이라고 불렀다. 1356년(공민왕 5) 원(元)나라의 연호를 폐지하면서 모든 관제를 복구함에 따라 문하시중으로 되었다. 1362년 중서문하성이 도첨의부로 바뀌자 다시 첨의좌정승 ·첨의우정승으로 분리되었다. 1369년 도첨의부를 문하부로 고치자 문하좌시중 ·문하우시중이 되었으며, 창왕(昌王) 때는 시중(侍中) ·수시중(守侍中)으로 불렸다
참고문헌 : 瀛洲誌(영주지), 高麗史(고려사), 世家篇(세가편),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 東國文獻備考(동국문헌비고),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 高麗史志(고려사지)
성주공 문하시중 휘 유 중시조 2세(星主公 門下侍中 諱 維 中始祖二世)
고려초기의 문인. 중시조 성주공 諱(휘) 末老(말로)의 장자로서 星主爵(성주작)을 물려받았다.
고려 현종때 文憲公(문헌공) 최충의 문하에서 師事(사사)하여 1045년(靖宗(정종)11년 乙酉(을유))에 南省試(남성시-科擧(과거))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고 다음해에 賓貢(빈공-국빈대우)으로 李作挻(이작연) 榜(방)에 세사람 중에 급제하여 右拾遺(우습유)가 되었다.
1057년(文宗(문종)11년) 中書省(중서성)에서 奏(주)하기를 '공은 탐라국 출신이므로 諫官(간관)으로서는 적합하지 못하니 그의 재주를 아까워 할 것 같으면 다른 벼슬을 除授(제수) 하소소' 하였다. 이렇듯 당시 탐라인의 중앙진출은 많은 제한을 받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 후에 공은 秘書少監(비서소감)으로 임명되었으니 인물이 얼마나 출중하고 비범하였는지 짐작 할 수 있다.
그후 공은 탐라에 돌아와 성주의 직분으로서 1034년(德宗(덕종) 甲戌(갑술)) 9월 고려에 입조하여 靖宗(정종)의 즉위를 축하하고 국가 祭典(제전)인 入關會(입관회)에 宋(송), 東西女眞(동서여진)의 사신과 함께 참석하였으니 이때부터 탐라는 고려의 주요 行事(행사)에 사신과 方物(방물)을 보냈다. 이때 고려에 보내는 탐라의 土産物(토산물)은 橘顆(귤과), 牛黃(우황), 牛角(우각), 牛皮(우피), 榧子(비자),海藻(해조), 龜甲(귀갑)등이 主種(주종)을 이루었다.
고려는 탐라와 처음 交聘(교빙)할 때와는 달리 세월이 지나면서 1년에 한번씩 朝見(조견)함과 동시에 方物(방물)을 바치도록 강요하여 왔다. 이에 공은 고려의 門下省(문하성)을 통하여 탐라의 땅은 메마르고 또한 태풍이나 가뭄 등으로 土産物(토산물)의 수확이 감소될 때가 많으므로 歲貢額(세공액)을 감하여 줄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자 1052년(文宗(문종) 6년 壬辰(임진)) 3월에 고려왕은 탐라의 세공액을 고쳐서 橘子(귤자) 백포로 정하여 주었다.
다음 해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 朝貢(조공)하니 그 답례로 고려는 탐라에 公服(공복), 銀帶(은대), 綵緞(채단), 藥物(약물)등을 보내왔다. 1055년(文宗(문종) 9년 乙未(을미)) 2월에 공은 사신과 수행원을 대동하고 入闕(입궐)하여 태자 冊立(책립)을 축하하고 朝宗館(조종관)에서 왕이 베푼 연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송, 일본, 契丹(계단), 黑水(흑수)등 여러 나라 來獻使節(래헌사절)들도 같이 참석하였으니 탐라성주인 공의 좌석 서열은 세 번째로 각별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공은 인근 諸國(제국)들과 교역을 활발히 전개하여 文物(문물)을 많이 받아드렸고 탐라의 옛 宮城(궁성)을 보수하는 한편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후 공은 왕의 부름을 받고 入朝(입조)하여 다시 벼슬길에 나갔으니, 1057년(文宗(문종) 11년 丁酉(정유))에 秘書少監(비서소감)을 거쳐 東北路兵馬副使(동북로병마부사)가 되었고 1070년(文宗(문종) 24년 庚戌(경술)) 4월에는 兵部侍郞(병부시랑), 左諫議大夫(좌간의대부), 西北路兵馬副使(서북로병마부사)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國子監試(국자감시)의 試官(시관)이 되어 두 과목에 75명을 급제시켰다.
1058년(文宗(문종) 12년 戊戌(무술)) 가을에 고려는 大船(대선)을 만들기 위해 한라산의 목재를 벌채하려 하였으니 이에 공은 門下省(문하성)에 상소하기를 '지난해에도 佛寺(불사)를 창건하느라 한라산의 재목을 많이 벌채한바 있고 탐라인의 노고와 산림 손상이 많으므로 혹시 다른 변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하니 왕은 공의 상소를 받아드려 그 일을 중지하였다. 한편 고려에 가는 朝貢船(조공선)과 일본, 중국 등으로 가는 交易船(교역선)이 여러 차례 태풍 등으로 표류됐다가 돌아오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침몰되어 많은 인명과 재물의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1071년(文宗(문종) 25년 辛亥(신해))에 공은 右僕射(우복사), 門下侍中(문하시중)이 되었으니 탐라 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고려의 臺官(대관)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탐라국 王孫(왕손)으로서 명문의 家統(가통)을 이어 받은 후손들이 활발히 진출하여 높은 벼슬을 하였고 한편으로는 탐라성주로서 많은 治蹟(치적)을 남겼다.
▷ 문하시중(門下侍中)
나라의 모든 정치를 총괄하는 대신이다. 982년(성종 1) 내의성(內議省)을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개편하면서 내사령(內史令)과 함께 처음으로 두었다. 1061년(문종 15) 관제개편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이름을 바꾸고, 1275년(충렬왕 1) 중서문하성 ·상서성(尙書省)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고침에 따라 문하시랑 대신 좌첨의중찬(左僉議中贊) ·우첨의중찬(右僉議中贊)으로 나누어 각 1명씩 두었다.
그 후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한 적이 있으나 곧 중찬으로 복구, 1308년 첨의부가 도첨의부(都僉議府)가 됨으로써 정승(政丞)이라고 불렀다. 1356년(공민왕 5) 원(元)나라의 연호를 폐지하면서 모든 관제를 복구함에 따라 문하시중으로 되었다. 1362년 중서문하성이 도첨의부로 바뀌자 다시 첨의좌정승 ·첨의우정승으로 분리되었다. 1369년 도첨의부를 문하부로 고치자 문하좌시중 ·문하우시중이 되었으며, 창왕(昌王) 때는 시중(侍中) ·수시중(守侍中)으로 불렸다
참고문헌 : 瀛洲誌(영주지), 高麗史(고려사), 世家篇(세가편),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 東國文獻備考(동국문헌비고),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 高麗史志(고려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