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익(髙挺益) 중시조 4세손(世孫), 4대(代) 성주(星主)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6:37
조회
279
고정익(사부상서공) - 4세손(世孫)
성주공 사부상서 휘 정익 중시조 4세(星主公 使部尙書 諱 挺益 中始祖四世)
? ∼ 1214년(高宗(고종) 1년). 受封(수봉) 三城君(삼성군). 고려 초기의 문인(使部尙書(사부상서)).
성주 文敬公(문경공) 諱(휘) 兆基(조기)의 둘째 아들로서 공의 형 挺琥(정호)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문경공의 뒤를 이어 성주가 되었다. 공은 효성으로써 경세의 본을 세웠는데 성품이 온화하고 후덕하였으며 선대의 가르침을 이어 받아 학문을 쌓았다. 仁宗(인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1140년(仁宗(인종) 18년 庚申(경신))에 벼슬길에 올라 毅宗(의종)때에 使部尙書(사부상서) 門下侍中(문하시중)이 되었다.
한편 탐라는 1105년(肅宗(숙종) 10년 乙酉(을유))에 탐라국이 郡(군)으로 1153년(毅宗(의종) 7년 癸酉(계유))에는 다시 郡(군)에서 縣(현)으로 개편되었으니 탐라는 고려의 일개 州郡(주군)으로서 사실상 성주의 실권은 약화 되었다. 반면에 고려는 탐라에 대한 제도를 강화하는 한편 土産物(토산물)등은 빈번히 朝貢(조공)케 하고 勾當使(구당사)와 고려 관리들의 착취와 횡포는 날로 심해졌다.
이에 탐라인들의 怨聲(원성)이 높아가고 민심이 소요가 일어나자 고려 조정에서는 1161년(毅宗(의종) 15년 辛巳(신사))에 처음으로 令尉(영위) 崔陟卿(최척경)을 보내어 폐단을 시정하고 按撫(안무)케 하였다. 그러나 그후 1168년(毅宗(의종) 22년 戊子(무자)) 11월에 良守(양수)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다시 영위 崔陟卿(최척경) 과 按撫使(안무사) 趙冬曦(조동희)를 보내어 진압하였다.
1173년(明宗(명종) 3년 癸巳(계사)) 3월에 공은 벼슬을 다하고 고향에 돌아오니 왕은 三城君(삼성군)에 封爵(봉작)을 가하고 성주의 職分(직분) 높이어 탐라의 按撫(안무)를 당부하기도 하였다.
1202년(神宗(신종) 5년 壬戌(임술)) 10월에 탐라인 煩石(번석), 煩守(번수)등 무리가 반란을 일으켜 불을 지르고 사람을 헤치는 등 난동을 부리자 공은 按撫使(안무사) 張允文(장윤문)등과 같이 난을 평정하고 주모자를 처단하였다.
성주인 공은 고려왕에게 상소하여 다섯 가지 폐단을 시정케 하였으니 歲貢額(세공액)을 감하여 받았고 고려 관리들의 횡포를 막는 등 탐라의 권익을 높이고 善政(선정)을 베풀었으니 이후부터 평온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이에 왕은 공을 친히 引見(인견)하여 공로를 치하하고 후대하였으며 많은 賜物(사물)을 내렸다. 그후 1214년(高宗(고종) 1년 甲戌(갑술))에 공이 고향에서 별세하니 왕은 사신을 보내어 후히 禮葬(예장)케 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科官譜(조선과관보),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
성주공 사부상서 휘 정익 중시조 4세(星主公 使部尙書 諱 挺益 中始祖四世)
? ∼ 1214년(高宗(고종) 1년). 受封(수봉) 三城君(삼성군). 고려 초기의 문인(使部尙書(사부상서)).
성주 文敬公(문경공) 諱(휘) 兆基(조기)의 둘째 아들로서 공의 형 挺琥(정호)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문경공의 뒤를 이어 성주가 되었다. 공은 효성으로써 경세의 본을 세웠는데 성품이 온화하고 후덕하였으며 선대의 가르침을 이어 받아 학문을 쌓았다. 仁宗(인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1140년(仁宗(인종) 18년 庚申(경신))에 벼슬길에 올라 毅宗(의종)때에 使部尙書(사부상서) 門下侍中(문하시중)이 되었다.
한편 탐라는 1105년(肅宗(숙종) 10년 乙酉(을유))에 탐라국이 郡(군)으로 1153년(毅宗(의종) 7년 癸酉(계유))에는 다시 郡(군)에서 縣(현)으로 개편되었으니 탐라는 고려의 일개 州郡(주군)으로서 사실상 성주의 실권은 약화 되었다. 반면에 고려는 탐라에 대한 제도를 강화하는 한편 土産物(토산물)등은 빈번히 朝貢(조공)케 하고 勾當使(구당사)와 고려 관리들의 착취와 횡포는 날로 심해졌다.
이에 탐라인들의 怨聲(원성)이 높아가고 민심이 소요가 일어나자 고려 조정에서는 1161년(毅宗(의종) 15년 辛巳(신사))에 처음으로 令尉(영위) 崔陟卿(최척경)을 보내어 폐단을 시정하고 按撫(안무)케 하였다. 그러나 그후 1168년(毅宗(의종) 22년 戊子(무자)) 11월에 良守(양수)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다시 영위 崔陟卿(최척경) 과 按撫使(안무사) 趙冬曦(조동희)를 보내어 진압하였다.
1173년(明宗(명종) 3년 癸巳(계사)) 3월에 공은 벼슬을 다하고 고향에 돌아오니 왕은 三城君(삼성군)에 封爵(봉작)을 가하고 성주의 職分(직분) 높이어 탐라의 按撫(안무)를 당부하기도 하였다.
1202년(神宗(신종) 5년 壬戌(임술)) 10월에 탐라인 煩石(번석), 煩守(번수)등 무리가 반란을 일으켜 불을 지르고 사람을 헤치는 등 난동을 부리자 공은 按撫使(안무사) 張允文(장윤문)등과 같이 난을 평정하고 주모자를 처단하였다.
성주인 공은 고려왕에게 상소하여 다섯 가지 폐단을 시정케 하였으니 歲貢額(세공액)을 감하여 받았고 고려 관리들의 횡포를 막는 등 탐라의 권익을 높이고 善政(선정)을 베풀었으니 이후부터 평온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이에 왕은 공을 친히 引見(인견)하여 공로를 치하하고 후대하였으며 많은 賜物(사물)을 내렸다. 그후 1214년(高宗(고종) 1년 甲戌(갑술))에 공이 고향에서 별세하니 왕은 사신을 보내어 후히 禮葬(예장)케 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科官譜(조선과관보),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