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씨중앙종문회 02)755-0919
고씨종문회총본부 064)751-0711, 758-5355
만든이 중시조32세손 고재민 jemina23@naver.com

종문자료실

Created with Sketch.

성주고씨가전(星主髙氏家傳)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3-10-15 00:11
조회
2912
『동문선 43권 130면에 소재되어 있는 탐라(耽羅)의 역사이며 성주(星主)에 관한 문헌이다.1416년7월에 대제학 정이오(鄭以吾)가 지음』


탐라(耽羅)의 경내에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곳에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어 한라산(漢拏山)이라 하니,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의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신인(神人)을 산의 북쪽인 모흥혈(毛興穴)에 탄강시켰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솟아났는데 고을나(髙乙那)ㆍ양을나(良乙那)ㆍ부을나(夫乙那)라 한다. 그런데 고을나는 곧 고씨의 시조다. 모두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먹고 지냈다. 족보(族譜)에 이르기를,

“일본국의 임금이 딸 일곱을 낳았는데, 딸 넷은 단적국(丹狄國)으로 보냈다. 단적은 곧 이른바 적적(赤狄)의 종족이다. 그 딸 셋에게 명령하기를, ‘서남쪽 바다에 산이 있어서 그 산이 잉태하여 신인 3형제를 낳았는데, 국가를 세우려 하는 배필이 없으니 너희들은 가서 그를 섬기라.후세에 자손이 반드시 번성하여 많아질 것이다.’

하고 그들을 배에다 태우고 오곡(五穀)의 씨앗과 마소[牛馬]까지 갖추고 또한 신인으로 하여금 보호하여 그들을 보냈다. 탐라의 동쪽 바닷가에 이르렀다. 신인의 아들 세 사람이 사냥하러 나왔다가, 그들과 만났는데, 그를 보호하고 온 신인은 곧 붉은 가죽 띠를 띠고 자줏빛 장삼을 입었는데 공중으로 날아서 가버렸다. 세 사람은 나누어서 그들에게 장가를 들어가지고 모흥굴(毛興窟) 근처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수년을 지내는 동안 살림이 모두 이루어졌고 그 후손이 차츰 커졌다. 고을나의 15세손인 고후(髙厚)에 이르러 그의 아우인 고청(髙淸)과 장차 신라에 조회하려 하는데, 객성(客星)이 먼저 나타났다. 관대(觀臺)에서 아뢰기를,

"다른 나라에서 신인(神人)이 조회하러 올 징조입니다."하였다.

얼마 후에 고후의 형제가 바다를 건너서 처음으로 탐진(眈津)에 닿아서 드디어 신라에 이르렀다. 왕은 그들을 반가이 대접하고, 객성이 먼저 나타났기 때문에 고후에게 성주(星主)라는 작위를 주고, 또한 고청은 왕의 다리 밑으로 기어나오게 하고는 그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여 왕자를 삼고, 고을의 칭호를 ‘탐라’라 하였다.

대개 "탐진에서 신라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신라의 역사에 이것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전조(前朝)의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성주는 고자견(髙自堅)이고, 왕자(王子)는 양차미(梁且美)였으니 곧 양을나(梁乙那)의 후손인데, 양(梁)으로 고친 것은 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한 세대에 한 번씩 조회하기로 하였는데, 태조는 그들을 특별히 대우하여 낮에 세 번씩 접견하며 음식과 접대하는 범절이 거의 임금과 비슷하게 하였고, 데리고 온 사람과 사공에 이르기까지 물품을 중첩으로 내렸다.

대체로 그를 특별히 총애한 것이다. 그러나 성주와 왕자를 세습하였을 뿐이요, 왕국(王國)에서 벼슬에 올라 크게 드러난 것은 아직 없었다. 고유(髙維)가 처음 빈공(賓貢)에 합격하여 정왕(靖王: 정종) 을유년에 남성시(南省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병술년에 이작정(李作梃)의 방(牓)에서 제3인으로 합격하여 벼슬이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고, 아들인 조기(兆基)는 처음 이름은 당유(唐愈)였는데, 예왕(睿王: 예종) 정해년에 한직유(韓即由)의 방에서 과거에 올라, 인왕(仁王: 인종)의 조정에서 대각(臺閣)에 출입하였다.

바른 말을 좋아하여 용감히 간하였고, 의왕(毅王: 의종)을 도와서 무진년의 과거를 맡아 보았고, 지위가 평장판리부사(平章判吏部事)에 이르렀다. 명망과 행적이 뚜렷하였으며 시집(詩集) 두 권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평장의 아들인 정익(廷益)의 아들 고적(髙適)이 그 책 끝에 서술하기를,

“아들 정호(廷琥)는 벼슬이 3 품에 오르고 총명한 재질을 가졌으나 일찍 죽고, 다만 정익(廷益)은 원왕(元王)의 계사년 봄에 은퇴하기를 청하여 시골에 돌아왔다.” 하였고,

과거의 학자인 최해(崔瀣)는 《동인문(東人文)》에 주석을 붙이기를,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었다.”

하였으니 아마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고적은 원왕[元宗]때에 과거에 올라, 바로 금규(金閨)에 들어왔고, 부모를 뵙기 위하여 고향에 돌아왔다가 지원(至元) 8년인 신미년 여름에 이르러 신의군(神義軍)과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탐라에 들어와, 20년인 계유년 여름 4월에 나라에서 군대를 물을 건너보내어 그들을 토벌하여 모조리 없애버리는데, 고적으로 유총관(留摠管)을 삼아 특히 남은 백성을 위안하여 모아들이게 하였다.

무인년 여름에 조정에 들어왔으므로 왕은 친히 금패(金牌)를 내려주었다. 갑신년에 총관부(摠管府)를 군민안무사사(軍民安撫使事)로 고쳤다. 이리하여 세대를 이어가면서 드디어 나타나게 되었다.

5세손인 인탄(仁坦)은 작위를 세습하였는데, 지원 신사년에 원(元)에서 일본을 토벌하려 하여 전 왕조에게 명하여 전투용 함정 9백 척과 군수물자와 무기 일체를 준비하게 하였다. 명령을 탐라에 내려서 배 1백 척을 만들게 하고 물자도 여기에 맞추어서 모자라는 것이 없게 하였는데, 그 계획이 모두 인탄에게서 나온 것이다. 지원 21년에 또 임금의 명령으로 금패에 명위장군(明威將軍) 안무사사(安撫使事)의 발령을 받았다.

29년에는 정동행(征東行) 중서성(中書省)의 명령에 의하여 탐라 지휘사(指揮使)에 보충되였다.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부사인 문창우(文昌祐)와 동지(同知)인 김선(金瑄)과 계책을 정하고, 원나라에 아뢰어 본국에 소속되게 하였다. 충렬왕은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역어 낭장(譯語郞將)인 정공(鄭恭)과 임양필(任良弼)을 시켜서 왕명으로 불러들여 성주운휘(星主雲麾) 상장군(上將軍)을 삼고 붉은 가죽띠와 자주빛 옷과 보개(寶蓋)를 내리고 물품을 준 것이 적지 않았다. 붉은 가죽띠와 보개를 내린 것은 신라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충렬왕이 이르기를,

“신라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지극한 정성이 가상하다. 성주(星主)의 직을 영원한 세대까지 떨어뜨리지 말라.” 하였다.

인탄이 이를 동복(同腹) 아우인 수좌(守佐)에게 전하고 후계자가 없었다. 인탄의 아들인 고석(髙碩)이란 사람이 서도 부천호(潟副千戶)가 되었는데, 뒤에 석의 맏아들인 순량(順良)이 성주의 직을 이어 받았고, 아우인 순원(順元)이 이를 계승하였다.

그의 아들인 호조전서(戶曹典書) 고신걸(髙信傑)이 홍무(洪武) 기유년에 서해도 부천호(西海道副千戶)가 되었는데, 그후 7년에 현릉(玄陵: 공민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합적(哈赤)을 토벌하고 뒤에 그대로 신걸을 부천호(副千戶)로 삼았다. 이듬해인 을묘년에 차현유(車玄有)와 내성(內城)의 무리가 역적을 도모하여 □난을 일으키고 본국의 만호를 죽였다.

신걸은 곧 왕자(王子) 문충걸(文忠傑)과 더불어 나라에 청하여 그를 토벌하여 평정하려 했더니, 차현유의 무리가 그것을 알고 3 일 동안이나 고씨와 문씨의 두 집을 포위하고 가축을 모조리 죽여버렸는데, 고와 문 두 사람은 간신히 몸을 빠져나와서 화를 면하고 나라의 권위를 힘입어 그들의 죄를 바로잡았다.

병진ㆍ정사년에는 왜적의 배 6백 척 가량이 둘러싸고 들어왔는데 신걸이 화살에 맞으면서도 마음을 다하여 이를 막아내어 관직과 상을 받았다. 갑자년에 성주의 칭호를 더해주고 그리하여 붉은 가죽 띠와 자주빛 옷과 보개 및 활과 화살을 내려주고 안팎에서 술을 베풀어 주었다.

신걸이 아들 넷을 두었는데 봉인(鳳仁)ㆍ봉의(鳳義)ㆍ봉례(鳳禮)ㆍ봉지(鳳智)였다. 인(仁)과 의(義)는 모두 일찍 죽었다. 봉례는 자가 백공(伯恭)이요, 봉지는 중명(仲明)인데,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을 섬기어 봉례는 벼슬이 총제(摠制)에 이르렀고, 봉지는 절충상장군(折衝上將軍)이었다. 봉례는 맏으로 성주를 습작하였고 봉지는 먼저 죽었다.

아들은 지금 사온서령(四醞署令)인 득종(得宗)인데, 여묘(盧墓)를 살면서 예를 극진히 하여 지방 사람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았다. 조정에 보고하여 그 마을 문에 정표하였다. 지금의 임금 갑오년에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이 되어 탐라의 사정과 그에 대한 적의한 시책을 조항별로 나열하여 글을 대궐에 올리어 모두 커다란 폐단을 없앴다.

이해 가을에 임금께서 대궐에 나앉으시어 친히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득종이 대책을 지어 을과(乙科)에 제13번째로 합격하고, 이듬해에 성주의 작을 세습받고 여러 번 옮기어 사헌 감찰ㆍ형조 도관좌랑(刑曹都官佐郞)ㆍ예조 좌랑이 되었다. 무술년 가을 7월에 사명을 받들고 고향에 돌아가니 인사들이 모두 그를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득종이 이오(以吾)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이 모흥혈(毛興穴)에서 기초를 세운 이후로 신라로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성주(星主)의 작위를 세습하였고, 국가를 섬기어 충성심이 그치지 아니하였으나 잠깐 동안에 옛 일이 되고 말기 때문에 이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아니하면 그것이 모두 없어져서 장래의 후손들에게 보여줄 것이 없을까 두렵다. 그러나 세대의 차서라든가 족보의 기록이 완전하지 못하여 우선 대략을 적어서 부탁한다.”

하였다. 이오는 들으니 이윤(伊尹)은 공상(空桑)에서 낳았고, 부열(傅說)은 부암(傅巖)에서 낳았다 하기에 일찍이 괴상스럽게 여기고 이를 의심하였다.그러다가 〈생민편(生民篇)〉의 시(詩)의 전(傳)을 읽어보니 옛 학자가 이르기를,

“천지가 시작될 때에는 본시 인간이 없었다. 곧 인간은 조화에 의하여 생겨난 것으로 대개 천지의 기운이 이것을 낳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한 득종(得宗)의 선대의 사적이 이러한 것을 보고나서 신인의 출생이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몸이 석대(碩大)하여 업적이 뚜렷한 인물이 두드러지게 서로 계속되어 그의 세습적인 관직을 떨어뜨리지 아니함이 마땅하도다. 하물며 득종은 나이가 아직 30도 못되었는데 뜻이 더욱 겸손하며 빛나고 그 기이한 기운과 위대한 기절이 씩씩하게 평장(平章)의 기풍과 자취가 남아 있으니,

아, 고씨(髙氏)의 운수는 그 끝이 없으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