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동(髙羲東)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8:08
조회
896
고희동(髙羲東·1886∼1965) 호는 춘곡(春谷), 서울 출생.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까지 등장한다.
1903년 한성법어학교를 졸업, 이듬해 궁내부주사로 들어가 예식관 등을 역임하고, 이 무렵부터 취미로 서화를 시작하여 안중식,조석진에게 배웠다.
1908년 한국 최초의 미술유학생으로 일본에 가서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휘문·보성·중동 등의 학교에서 서양화를 가르쳤다.
1918년 서화협회를 창립하여 새로운 미술운동을 전개하고 그 일환으로 협전을 18회나 개최하였다.
광복 후 조선미술협회장, 전국 문화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고, 48년 한민당 상임위원, 1949년 국전 심사위원장, 54년 예술원 종신회원, 55년 예술원장으로 선출되는 한편 민주당 고문, 민권수호연맹위원장 등으로 추대되었다.
1960년 민주당 공천으로 참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5·16군사정변 후인 61년 이후는 은퇴하였다.
그의 화풍은 전통적인 남화 산수화법에 서양화의 색채·명암법을 써서 감각적인 새로운 회화를 시도했다.
1949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으며, 그가 돌아가시자 예총장으로 치러졌다.
작품으로 《금강산진주담폭포》 《탐승》 등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까지 등장한다.
1903년 한성법어학교를 졸업, 이듬해 궁내부주사로 들어가 예식관 등을 역임하고, 이 무렵부터 취미로 서화를 시작하여 안중식,조석진에게 배웠다.
1908년 한국 최초의 미술유학생으로 일본에 가서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휘문·보성·중동 등의 학교에서 서양화를 가르쳤다.
1918년 서화협회를 창립하여 새로운 미술운동을 전개하고 그 일환으로 협전을 18회나 개최하였다.
광복 후 조선미술협회장, 전국 문화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고, 48년 한민당 상임위원, 1949년 국전 심사위원장, 54년 예술원 종신회원, 55년 예술원장으로 선출되는 한편 민주당 고문, 민권수호연맹위원장 등으로 추대되었다.
1960년 민주당 공천으로 참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5·16군사정변 후인 61년 이후는 은퇴하였다.
그의 화풍은 전통적인 남화 산수화법에 서양화의 색채·명암법을 써서 감각적인 새로운 회화를 시도했다.
1949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으며, 그가 돌아가시자 예총장으로 치러졌다.
작품으로 《금강산진주담폭포》 《탐승》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