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孝子) 고재성(髙在聖) 정려기(旌閭記)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10-08-27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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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孝子) 고재성(髙在聖) 정려기(旌閭記)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신금리 신금마을 제주고씨
魯論曰:“孝悌也者, 其爲仁之本歟.” 盖仁之本, 本於孝, 孝之始於愛, 敬以養志,
노론왈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개인지본 본어효 효지시어애 경이양지
敬以愉色, 軆誠而用稽, 則是爲事親之端倪也, 於養生送死, 曷有後憾哉?
경이유색 체성이용계 즉시위사친지단예야 어양생송사 갈유후감재
若髙五衛將在聖, 誠孝根天, 出於自然, 非勉强而行者矣. 粤自先世, 忠孝傳家,
약고오위장재성 성효근천 출어자연 비면강이행자의 월자선세 충효전가
忠烈公霽峰先生之後通訓光中子也. 在齠齔, 岐嶷異凡, 定省溫凊, 出反而告,
충렬공제봉선생지후통훈광중자야 재초츤 기억이범 정성온청 출반이곡
不敎而能. 且最愛孝經之切要, 常誦小學之善行, 語言必出乎禮法, 動作不外乎正大.
불교이능 차최애효경지절요 상송소학지선행 어언필출호예법 동작불외호정대
及其長, 服勞忠養, 甘毳供旨, 漁樵承歡, 克勤不弛, 效董生之行義矣. 當親癠
급기장 복로충양 감취공지 어초승환 극근불이 효동생지행의의 당친제
危谷尤之際, 百藥却功, 祈天願代, 時値隆冬, 思食鮮菜, 卒難求得, 而命幾垂殞,
위(극)지제 백약각공 기천원대 시치융동 사식선채 졸난구득 이명기수운
公乃蒼黃血淚蔽赤, 尺鱗躍氷, 凍菜抽雪, 遂拾湯煮, 灌喉扶冒, 因得迴甦, 是知天
공내창황혈루폐적 척린약빙 동채추설 수습탕자 관후부모 인득회소 시지천
感物應者, 豈惟王祥也·孟宗也.
감물응자 기유왕상야 맹종야
嗟! 夫世道日微, 滄桑焂変, 人不知爲仁之本在於孝, 口體之奉, 猶似路人,
차 부세도일미 창상숙변 인부지위인지본재어효 구체지봉 유사노인
可不懼哉 雖然, 我是先王之赤子, 而秉彛之性, 發於油然, 倫綱之大原, 恐或墜地,
가불구재 수연 아시선왕지적자 이병이지성 발어유연 윤강지대원 공혹추지
惟公特行, 終歸泯沒, 故京鄕章甫, 齊謨共議, 摭實仰龥, 旣蒙褒典, 表竪旌閭,
유공특행 종귀민몰 고경향장보 제모공의 척실앙유 기몽포전 표수정려
刻之貞玟, 俾無杞宋之歎, 故仍爲之銘曰:
각지정민 비무기송지탄 고잉위지명왈
髙出耽羅, 寔爲大族. (고출탐라, 식위대족)
忠烈霽峰, 文獻已足. (충열제봉, 문헌이족)
通訓有子, 顯揚其親. (통훈유자, 현양기친)
克誠克敬, 卒迺成仁. (극성극경, 졸내성인)
漁樵供旨, 儔與蕫生. (어초공지, 주여동생)
氷魚復出, 雪筍抽萌. (빙어부출, 설순추맹)
後人矜式, 光耀丹靑. (후인긍식, 광요단청)
壬申臘月之下澣
임신납월지하한
嘉善大夫弘文館副提學 礪山 宋昌燮 撰
가선대부홍문관부제학 여산 송창섭 찬
효자 고재성(髙在聖)의 정려기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신금리 신금마을 제주고씨
노(魯) 나라의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효도와 공경은 인(仁)의 근본일 것이다.”고 하였으니, 대개 인의 근본은 효도에 있고 효도는 사랑에서 시작한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뜻을 봉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온화한 안색을 지녀, 체(體)를 정성되게 하고 용(用)을 고찰하여 행한다면 이것이 부모를 섬기는 시작과 끝이다. 생전에 봉양하고 사후에 장사를 지냄에 있어 어찌 후회가 있겠는가.
오위장(五衛將) 고재성(髙在聖)으로 말하면, 정성된 효도는 하늘에 근본하여 자연에서 나온 것이었고 억지로 노력하여 행한 것이 아니었다. 지난 선대로부터 충성과 효도를 집안 대대로 전해왔으니, 충렬공(忠烈公) 제봉 선생(霽峰先生) 고경명(髙敬命)의 후손인 통훈대부(通訓大夫) 고광중(髙光中)의 아드님이시다. 어릴 때에 총명함이 비범하였으니, 아침에는 문안하고 저녁에는 잠자리를 정하여 드리며,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나가고 들어올 때에 부모님께 고하는 것들을 가르치지 않아도 잘 하였다. 또한 《효경(孝經)》의 절요(切要)함을 가장 좋아하고 《소학(小學)》의 선행(善行)을 항상 외워, 언어는 반드시 예법(禮法)에서 나왔고 행동은 정대(正大)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장성함에 미쳐서는 부모님의 노고를 대신하였고 정성으로 봉양하여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서 올렸다. 고기 잡고 나무하여 부모님을 모셨는데, 부지런히 하고 게을리 하지 않아 동소남(董召南)의 행의(行義)를 본받았다. 《소학(小學)》에 보이는 당(唐) 나라 때의 인물. 안풍현(安豊縣)에 평생을 은거하여 살면서 효행을 행하였음.
부모님의 병이 위독할 때를 당해서 온갖 약이 아무 효력도 없게 되자, 하늘에 빌면서 자신이 대신 죽기를 바랐다. 때는 엄동설한인지라 부모님께서 생선과 채소를 들고 싶어 하셨지만 끝내 구하여 얻기가 어려웠다. 거의 운명하시게 될 무렵, 공(公)이 다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피눈물이 앞을 가려 빨갛게 되었는데, 한 자 되는 잉어가 얼음 속에서 튀어 오르고 꽁꽁 언 채소가 눈 속을 뚫고 나왔다. 마침내 가져다가 끓이고 삶아 목에 넣어드리고 부축해 일으켜 세우니 이로 인해 회생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으니, 하늘이 감동하고 사물이 호응하는 것이 어찌 왕상(王祥)과 맹종(孟宗) 뿐이겠는가.
아! 대개 세상의 도가 날로 쇠미해지면서 변화도 빠르고 커서 사람들이 인의 근본이 효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구체(口體)를 봉양하는 일마저도 오히려 길가는 사람에게 하듯 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우리가 선왕(先王)의 적자(赤子)이기에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성이 저절로 왕성하게 일어나기는 하지만, 오륜(五倫)과 삼강(三綱)의 큰 근원이 혹 실추되어 오직 공(公)의 뛰어난 행실이 끝내 민멸되고 말까 두려울 따름이다. 그래서 서울과 지방의 유생(儒生)들이 일제히 계획하고 함께 논의하여 기록을 모아서 우러러 상소(上訴)하였는데, 이미 포상의 은전을 입었으므로 정려문을 세우고 비문에 글을 새겨 기(杞) 나라와 송(宋) 나라 같은 한탄 기는 하(夏) 나라의 후예를 봉한 나라이고 송은 은(殷) 나라의 후예를 봉한 나라인데, 기 나라와 송 나라의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하 나라와 은 나라의 예(禮)를 고증하기 어렵다고 공자(孔子)가 한탄하였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어 명(銘)을 다음과 같이 짓는다.
고씨는 탐라(耽羅)에서 나왔으니
진실로 대족(大族)이 되었다네
충렬공 제봉 고경명에 대해는
문헌이 충분하다 할 수 있다네
통훈대부 고광중에게 아들이 있어
그의 부모를 높이 드러내었다네
능히 정성과 공경으로 효도하여
마침내 인(仁)을 이루었다네
고기잡고 나무하여 좋은 음식 올렸으니
그의 효성 동소남(蕫召南)과 짝할 만하네
얼음 속에서 물고기 튀어 오르고
눈 속에서 죽순이 싹을 피웠다네
후인들이 모범으로 삼아 공경하도록
단청을 입혀 빛나도록 만들었다네
임신년 12월 하순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여산(礪山) 송창섭(宋昌燮)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