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수(髙光壽) 공군대위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8:58
조회
566
1929.10.5-1953.7.18 전남 광주 출생
1929년 10월 5일 전라남도 광주시 양동 1구 5번지에서 출생한 고광수(髙光壽) 공군 대위는 1949년 6월 10일 사관후보생 제1기로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51년 8월 5일 공군 소위(군번 50828)로 임관하였다.
1952년 12월 14일 F-51기를 타고 첫 출격을 시작한 그는 전사할 때까지 총 51회의 출격을 기록하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는 1953년 7월 18일 고성 및 시변리지구에 출격하여 지상군 직협작전을 전개하던 중 적의 대공포화에 피탄되어 전사하였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1953년 9월 10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51년 9월 28일 강릉으로 전진한 제1전투비행단 10전투비행전대는 1951년 10월 11일부터 동부전선의 원산지구 및 서부전선 일대에 대한 보급로차단을 시작하였고, 그 후 서남지구 공비토벌 및 적 후방보급로차단작전을 계속 수행하면서 전투능력을 향상시켜 1952년 10월 28일부터는 공지합동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제10전투비행전대는 공지합동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종전부터 실시해오던 후방차단작전도 병행하였는데, 이러한 두 가지 임무의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에 전투조종사의 전투기량은 크게 향상되었고, 또한 근접항공지원에 대한 효과가 점차 증대되자 지상군으로부터의 항공지원요청이 급증하게 되었다.
한편 1953년 2월에 이르러 공군에서 보유한 전 항공기 대수가 70여 대로 증강되고 이 중 F-51전폭기가 40대로 증가되자 새로운 전투비행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공군은 1953년 2월 15일 그 동안 제1전투비행단의 전진부대로 강릉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제10전투비행전대를 기간으로 제10전투비행단을 강릉기지에 창설하여 전투작전 분야만을 전담하도록 하고 또 공군전력의 기본이 될 조종사 양성에 한층 심혈을 기울이기 위해 사천기지의 제1전투비행단을 비행훈련에만 전력하도록 제1훈련비행단으로 개칭하였다.
이와 같이 '일면 전투, 일면 확장'의 부단한 노력 끝에 명실상부한 공군력을 보유하게 된 공군은 5월에는 F-51전폭기 80여 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6월부터는 동부전선의 제1군단뿐 아니라 중부전선의 제2군단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작전도 단행하는 등 휴전이 체결될 때까지 공지합동작전과 후방차단작전을 수행하였다.
1953년 2월 15일부터 휴전성립일인 7월 27일까지 제10전투비행단은 강릉기지를 중심으로 고성으로부터 문등리, 금성, 김화, 철원, 판문점을 연결하는 선의 북방전선에서 전투중인 아 지상군과 공지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적에게 큰 손실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보급품 수송을 저지하였다.
1953년 2월 15일부터 28일까지 제10전투비행단의 F-51전투기 연 193대가 출격해 금강산의 연화동과 고성지구에 대해 로켓탄과 폭탄 및 기관총으로 공격하여 벙커, 포진지, 자동화기진지, 건물, 보급물집적소, 참호, 동굴 등을 파괴시켰으며, 2월 16일에는 김만용(金萬鎔) 중위를 비롯한 6명의 조종사가 각각 100회 출격기록을 수립하여 한국공군의 실력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3월에는 후방차단작전 67대, 근접항공지원 252대 등 연 319대가 출격하여 고성, 평강, 연안, 안협 등지에 출격하여 건물, 차량, 탄약 및 보급품집적소, 포진지, 벙커 등을 파괴하고 적병 다수를 살상하였다. 또한 3월과 4월에는 황정덕(黃正德) 중위를 비롯한 5명의 조종사가 각각 100회 출격기록을 수립하였다.
1953년 5월부터는 F-51전폭기 80대로 전력이 증강되어 근접항공지원작전에 연 580대가 고성, 간성, 통천, 화천지구에 출격, 포진지, 보급물집적소, 버어, 건물 등을 파괴하거나 파손시켰으며, 5월 30일에는 유치곤(兪致坤) 대위가 한국공군 최초로 200회 출격기록을 수립하였다.
6월에는 국군 제2군단에 대해서도 근접항공지원을 실시하여 연 374대가 고성, 창도, 간성, 금성, 시변리지구에 출격, 벙커, 포진지, 화차, 교량, 보급물집적소 등을 파괴 또는 파손시켰다. 이어 7월에는 주로 근접항공지원 임무만을 수행하였는데, 연 372대가 금성, 신막, 고성, 남천, 간성, 시변리지구에서 건물, 보급물집적소, 교량, 포진지, 철교 등을 공격하여 파괴 및 파손시켰다. 특히 7월 13일부터 감행한 국군 제2군단에 대한 적의 대공세를 분쇄하기 위해 공군은 개전이래 최대의 출격을 감행하여 중동부전선의 적 주력부대를 공격하였고, 유엔공군과 더불어 악전고투하는 지상군에 대한 집중적인 근접지원으로 지상군작전을 유리하게 전환시켰다.
그러나 동 작전에서 제1기 사관출신인 고광수 중위는 시변리지구에서 맹공격 중 적의 대공포화에 피격되어 귀환 도중 동해 해상에서 추락하여 장렬히 전사하였다.
휴전성립일인 7월 27일에는 17개 편대가 하루종일 출격을 감행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적을 맹타하는데 전력을 집중하였다. 1953년 2월 15일부터 7월 27일까지 실시된 작전에서 한국공군은 보급물집적소 90개소, 벙커 267개소, 야포진지 32개소, 박격포진지 68개소, 자동화기진지 60개소, 대공포진지 2개소, 동굴 14개소, 건물 143동, 탄약집적소 2개소, 보급로 10개소, 철도 14개소, 화물차량 4차량, 철교 1개소, 터널 3개소 등을 파괴 및 파손시키는 전과를 기록하였다.
1929년 10월 5일 전라남도 광주시 양동 1구 5번지에서 출생한 고광수(髙光壽) 공군 대위는 1949년 6월 10일 사관후보생 제1기로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51년 8월 5일 공군 소위(군번 50828)로 임관하였다.
1952년 12월 14일 F-51기를 타고 첫 출격을 시작한 그는 전사할 때까지 총 51회의 출격을 기록하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는 1953년 7월 18일 고성 및 시변리지구에 출격하여 지상군 직협작전을 전개하던 중 적의 대공포화에 피탄되어 전사하였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1953년 9월 10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51년 9월 28일 강릉으로 전진한 제1전투비행단 10전투비행전대는 1951년 10월 11일부터 동부전선의 원산지구 및 서부전선 일대에 대한 보급로차단을 시작하였고, 그 후 서남지구 공비토벌 및 적 후방보급로차단작전을 계속 수행하면서 전투능력을 향상시켜 1952년 10월 28일부터는 공지합동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제10전투비행전대는 공지합동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종전부터 실시해오던 후방차단작전도 병행하였는데, 이러한 두 가지 임무의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에 전투조종사의 전투기량은 크게 향상되었고, 또한 근접항공지원에 대한 효과가 점차 증대되자 지상군으로부터의 항공지원요청이 급증하게 되었다.
한편 1953년 2월에 이르러 공군에서 보유한 전 항공기 대수가 70여 대로 증강되고 이 중 F-51전폭기가 40대로 증가되자 새로운 전투비행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공군은 1953년 2월 15일 그 동안 제1전투비행단의 전진부대로 강릉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제10전투비행전대를 기간으로 제10전투비행단을 강릉기지에 창설하여 전투작전 분야만을 전담하도록 하고 또 공군전력의 기본이 될 조종사 양성에 한층 심혈을 기울이기 위해 사천기지의 제1전투비행단을 비행훈련에만 전력하도록 제1훈련비행단으로 개칭하였다.
이와 같이 '일면 전투, 일면 확장'의 부단한 노력 끝에 명실상부한 공군력을 보유하게 된 공군은 5월에는 F-51전폭기 80여 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6월부터는 동부전선의 제1군단뿐 아니라 중부전선의 제2군단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작전도 단행하는 등 휴전이 체결될 때까지 공지합동작전과 후방차단작전을 수행하였다.
1953년 2월 15일부터 휴전성립일인 7월 27일까지 제10전투비행단은 강릉기지를 중심으로 고성으로부터 문등리, 금성, 김화, 철원, 판문점을 연결하는 선의 북방전선에서 전투중인 아 지상군과 공지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적에게 큰 손실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보급품 수송을 저지하였다.
1953년 2월 15일부터 28일까지 제10전투비행단의 F-51전투기 연 193대가 출격해 금강산의 연화동과 고성지구에 대해 로켓탄과 폭탄 및 기관총으로 공격하여 벙커, 포진지, 자동화기진지, 건물, 보급물집적소, 참호, 동굴 등을 파괴시켰으며, 2월 16일에는 김만용(金萬鎔) 중위를 비롯한 6명의 조종사가 각각 100회 출격기록을 수립하여 한국공군의 실력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3월에는 후방차단작전 67대, 근접항공지원 252대 등 연 319대가 출격하여 고성, 평강, 연안, 안협 등지에 출격하여 건물, 차량, 탄약 및 보급품집적소, 포진지, 벙커 등을 파괴하고 적병 다수를 살상하였다. 또한 3월과 4월에는 황정덕(黃正德) 중위를 비롯한 5명의 조종사가 각각 100회 출격기록을 수립하였다.
1953년 5월부터는 F-51전폭기 80대로 전력이 증강되어 근접항공지원작전에 연 580대가 고성, 간성, 통천, 화천지구에 출격, 포진지, 보급물집적소, 버어, 건물 등을 파괴하거나 파손시켰으며, 5월 30일에는 유치곤(兪致坤) 대위가 한국공군 최초로 200회 출격기록을 수립하였다.
6월에는 국군 제2군단에 대해서도 근접항공지원을 실시하여 연 374대가 고성, 창도, 간성, 금성, 시변리지구에 출격, 벙커, 포진지, 화차, 교량, 보급물집적소 등을 파괴 또는 파손시켰다. 이어 7월에는 주로 근접항공지원 임무만을 수행하였는데, 연 372대가 금성, 신막, 고성, 남천, 간성, 시변리지구에서 건물, 보급물집적소, 교량, 포진지, 철교 등을 공격하여 파괴 및 파손시켰다. 특히 7월 13일부터 감행한 국군 제2군단에 대한 적의 대공세를 분쇄하기 위해 공군은 개전이래 최대의 출격을 감행하여 중동부전선의 적 주력부대를 공격하였고, 유엔공군과 더불어 악전고투하는 지상군에 대한 집중적인 근접지원으로 지상군작전을 유리하게 전환시켰다.
그러나 동 작전에서 제1기 사관출신인 고광수 중위는 시변리지구에서 맹공격 중 적의 대공포화에 피격되어 귀환 도중 동해 해상에서 추락하여 장렬히 전사하였다.
휴전성립일인 7월 27일에는 17개 편대가 하루종일 출격을 감행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적을 맹타하는데 전력을 집중하였다. 1953년 2월 15일부터 7월 27일까지 실시된 작전에서 한국공군은 보급물집적소 90개소, 벙커 267개소, 야포진지 32개소, 박격포진지 68개소, 자동화기진지 60개소, 대공포진지 2개소, 동굴 14개소, 건물 143동, 탄약집적소 2개소, 보급로 10개소, 철도 14개소, 화물차량 4차량, 철교 1개소, 터널 3개소 등을 파괴 및 파손시키는 전과를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