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선(髙守善) 독립운동가,제주여성의 선각자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8:51
조회
1228
1898~1989 우인(又忍) 고수선(髙守善)
우인(又忍) 고수선(髙守善)여사는 1952년 5월 10일 제1대 제주도의회 의원 선거에 북제주군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제주여성 최초로 선거에 입후보한 것으로 비록 선거에서는 떨어졌지만 여권신장에 대한 첫 도전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3·1운동 참가를 시작으로 한 항일운동, 정치활동, 각종 사회사업 활동 등 격동기의 혼란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산 제주여성의 선각자이다..
고수선 여사는 1898년 5월 4일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가파리(현)에서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가파도와 모슬포 등 의견이 분분하지만 1973년 제남신문에 연재됐던 ‘내가 살아온 길’에 의하면 “당시 대정골에 속했던 가파도에서 태어나 7살까지 살았고, 그 이후는 모슬포로 이사가 살았다”고 하고 있다.
고석조(고영조)씨와 오영원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특히 어머니 오영원씨는 교육열이 높아 고수선 여사의 서울과 일본 유학시절을 모두 따라다니며 삯바느질로 뒷바라지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글을 배우는 데 목말라했던 고수선은 4km가 떨어진 야학을 몰래 다니려 했으나 아버지에게 들켜 포기했다가 후에 정식 허락을 받아 대정공립보통학교와 신성여학교에서 학업을 마친다.
서울 유학후 사범과 졸업…일본에서 의학 공부
1916년 서울로 유학을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다. 이무렵 제주에서 서울로 유학한 여성은 고수선, 강평국, 최정숙 셋 뿐이었다.
이 시절 일화 중 고수선의 성격이 드러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역사와 미술을 가르치는 일본인 시바다 교사가 이순신에 대해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자, 그 자리에서 거세게 항의한 것이다. 또한 일장기를 그리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어기고 몰래 태극기를 그린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고수선은 학교에서 불령(不逞) 학생으로 낙인찍힌다.
독살설 등의 파다한 소문을 뒤로 하고 고종황제가 승하하던 해인 1919년 고수선은 사범과에 진학한다. 그해 3월 1일, 교직원들은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수업을 중단한 채 학교 문을 잠그고 교무회의를 열었다. 이 사이 고수선은 도끼로 문을 부순 후 파고다공원으로 뛰어가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활발한 항일운동을 펼친다.
후에 사범과를 졸업하고 충청남도에서 교사활동을 하다 1922년 독립자금 모금에 연루되어 종로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다. 고수선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놓고 손을 비틀었던 고문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고 한다.
3ㆍ1운동 및 임시정부 자금 모금활동 펼쳐
갖은 고문 끝에 풀려난 고수선은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공부를 한다. 의사면허 취득 후 귀향, 인당(忍堂) 김태민과 결혼한다.
지금의 조천을 비롯해 한림과 서귀포, 고산 등을 돌아다니며 ‘장춘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의료활동을 펼치던 두 사람은 1944년 충청남도 강경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6.25가 발발하면서 오랜 피난생활을 하게 된다.
도의원 출마ㆍ대한노인회 회장 역임
제1회 만덕봉사상 수상
1.4후퇴때 다시 귀향한 두 사람은 의사생활을 청산한다. 김태민은 독서과 서예로 만년을 보냈으며 고수선은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전개한다.
조선시대 세워진 운주당(제주시 동문로터리 동남쪽)은 고수선 여사의 사회활동을 가능하게 한 무대가 된다. 문맹 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소를 비롯해 제주모자원, 인당 무용학원, 홍익 보육원, 선덕 어린이집, 경로당 등이 모두 이곳을 거쳤다.
또한 10여년 동안 대한노인회 제주도 연합회장을 역임하면서 노인들의 권위를 세우는 데 앞장섰으며 1980년 제1회 만덕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집안 일을 돌보는 가사보다는 독립운동, 여권신장과 정치, 사회활동에 더욱 많은 힘을 쏟아부었던 고수선 여사는 1989년 8월 11일 자택에서 9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1980년 정부는 독립 유공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우인(又忍) 고수선(髙守善)여사는 1952년 5월 10일 제1대 제주도의회 의원 선거에 북제주군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제주여성 최초로 선거에 입후보한 것으로 비록 선거에서는 떨어졌지만 여권신장에 대한 첫 도전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3·1운동 참가를 시작으로 한 항일운동, 정치활동, 각종 사회사업 활동 등 격동기의 혼란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산 제주여성의 선각자이다..
고수선 여사는 1898년 5월 4일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가파리(현)에서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가파도와 모슬포 등 의견이 분분하지만 1973년 제남신문에 연재됐던 ‘내가 살아온 길’에 의하면 “당시 대정골에 속했던 가파도에서 태어나 7살까지 살았고, 그 이후는 모슬포로 이사가 살았다”고 하고 있다.
고석조(고영조)씨와 오영원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특히 어머니 오영원씨는 교육열이 높아 고수선 여사의 서울과 일본 유학시절을 모두 따라다니며 삯바느질로 뒷바라지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글을 배우는 데 목말라했던 고수선은 4km가 떨어진 야학을 몰래 다니려 했으나 아버지에게 들켜 포기했다가 후에 정식 허락을 받아 대정공립보통학교와 신성여학교에서 학업을 마친다.
서울 유학후 사범과 졸업…일본에서 의학 공부
1916년 서울로 유학을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다. 이무렵 제주에서 서울로 유학한 여성은 고수선, 강평국, 최정숙 셋 뿐이었다.
이 시절 일화 중 고수선의 성격이 드러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역사와 미술을 가르치는 일본인 시바다 교사가 이순신에 대해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자, 그 자리에서 거세게 항의한 것이다. 또한 일장기를 그리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어기고 몰래 태극기를 그린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고수선은 학교에서 불령(不逞) 학생으로 낙인찍힌다.
독살설 등의 파다한 소문을 뒤로 하고 고종황제가 승하하던 해인 1919년 고수선은 사범과에 진학한다. 그해 3월 1일, 교직원들은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수업을 중단한 채 학교 문을 잠그고 교무회의를 열었다. 이 사이 고수선은 도끼로 문을 부순 후 파고다공원으로 뛰어가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활발한 항일운동을 펼친다.
후에 사범과를 졸업하고 충청남도에서 교사활동을 하다 1922년 독립자금 모금에 연루되어 종로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다. 고수선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놓고 손을 비틀었던 고문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고 한다.
3ㆍ1운동 및 임시정부 자금 모금활동 펼쳐
갖은 고문 끝에 풀려난 고수선은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공부를 한다. 의사면허 취득 후 귀향, 인당(忍堂) 김태민과 결혼한다.
지금의 조천을 비롯해 한림과 서귀포, 고산 등을 돌아다니며 ‘장춘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의료활동을 펼치던 두 사람은 1944년 충청남도 강경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6.25가 발발하면서 오랜 피난생활을 하게 된다.
도의원 출마ㆍ대한노인회 회장 역임
제1회 만덕봉사상 수상
1.4후퇴때 다시 귀향한 두 사람은 의사생활을 청산한다. 김태민은 독서과 서예로 만년을 보냈으며 고수선은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전개한다.
조선시대 세워진 운주당(제주시 동문로터리 동남쪽)은 고수선 여사의 사회활동을 가능하게 한 무대가 된다. 문맹 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소를 비롯해 제주모자원, 인당 무용학원, 홍익 보육원, 선덕 어린이집, 경로당 등이 모두 이곳을 거쳤다.
또한 10여년 동안 대한노인회 제주도 연합회장을 역임하면서 노인들의 권위를 세우는 데 앞장섰으며 1980년 제1회 만덕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집안 일을 돌보는 가사보다는 독립운동, 여권신장과 정치, 사회활동에 더욱 많은 힘을 쏟아부었던 고수선 여사는 1989년 8월 11일 자택에서 9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1980년 정부는 독립 유공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