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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빛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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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장(髙漢章) 제주판관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8:56
조회
156
생몰년 미상.조선조 영조 때의 제주판관

1740년(영조 16) 6월, 엄택주(嚴宅周)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742년 5월에 떠났다.

당시 제주목사는 조동점(趙東漸)과 안경운(安慶運)이며 정의현감은 김상환(金商煥), 대정현감은 신명대(申命大)이다.

1740년 목사 안경운(安慶運)이 산성사를 중수할 때 훈장 고처량(髙處亮)과 같이 위패를 품자형(品字刑)으로 배치할 것을 목사에게 건의, 고을나(髙乙那)를 주벽(主壁)으로 설정했다.

1786년(정조 10)에 이러한 사실을 알고 목사 이명준(李命俊)이 시조 위차변경문(始祖位次變更文)을 조정에 품신, 동년 11월 10일 판하(判下)를 받았다. 한편 1741년 2월 제주 사람 21명이 표류되었다가 이 때에 귀환하였다. 이들은 유구국(琉球國)에 1년 체류한 후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1년 체류하는 등 4년만에 돌아왔는데 그 사이 1명만이 죽었다.

이 무렵 김원재(金遠材)는 부친 용택(龍澤)의 위시(僞詩) 보관사건에 연좌되어 1740년(영조 16) 11월, 제주에 유배되었으니 그의 나이 32세 때의 일이다. 김원재는 대제학 김만중(金萬重)의 증손이며 부친 김용택은 임인무옥(壬寅誣獄)에 이미 죽었다.

참고문헌 :
선생안(先生案),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 제주도사론고(濟州島史論攷), 제주도유인전(濟州道流人傳), 고씨계록(髙氏世錄), 왕조실록(王朝實錄), 영운집(靈雲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