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붕(髙德鵬) 의병장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8:57
조회
473
1552 ∼ 1626, 자는 남익(南翊) 호는 여곡(麗谷),
1552년(명종 7)에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종송리 여곡에서 태어나 1626년(인조 4)에 졸하였다.
그는 1592년(선조 25) 41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자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작성하여 동지를규합했고 의병장 고경명(髙敬命)의 진영이 있는 금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 때는 고경명이 순절한 뒤였으므로 채홍국(蔡弘國) 등 92명의 동지와 삽혈동맹하고 그 맹주가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왜적과 여러 번 싸워 공을 세웠다. 또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의 주장이 되어 왜적과 여러 차례 싸웠으며 부안의 호벌치(胡伐峙)에서 싸울 때는큰 전과를 올리고 그곳에서 순절했다.
1893년(고종 30) 나라에서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증직하였고 유림의 추천으로 모충사(慕忠祠)에 향사하였다.
1552년(명종 7)에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종송리 여곡에서 태어나 1626년(인조 4)에 졸하였다.
그는 1592년(선조 25) 41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자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작성하여 동지를규합했고 의병장 고경명(髙敬命)의 진영이 있는 금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 때는 고경명이 순절한 뒤였으므로 채홍국(蔡弘國) 등 92명의 동지와 삽혈동맹하고 그 맹주가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왜적과 여러 번 싸워 공을 세웠다. 또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의 주장이 되어 왜적과 여러 차례 싸웠으며 부안의 호벌치(胡伐峙)에서 싸울 때는큰 전과를 올리고 그곳에서 순절했다.
1893년(고종 30) 나라에서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증직하였고 유림의 추천으로 모충사(慕忠祠)에 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