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림(髙亨林) 독립운동가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8:41
조회
427
1907. 8. 25~1975. 10. 5. 경북 예천(醴泉)출신.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장야(長野)・대판(大阪)・명고옥(名古屋)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사진기술을 익히고 귀국하였다. 귀국후 잠시 예천농회(農會) 지도원으로 있다가 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1938년 8월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안동성 임가대(林家臺)에서 사진업을 경영하다가 1940년 8월에 하남성 수무현 초작(河南省修武縣焦作)으로 이전하였다.
이곳에서 사진관을 경영하던 중 1941년 8월 광복군 제5지대에서 파견된 조씨(趙氏, 일본명:松田政茂)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제5지대장과 그 대원들의 연락장소로 자택을 제공하고 비밀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서주(徐州)에서 2명, 북경에서 2명, 택주(澤州)에서 2명 등 광복군 입대 희망자들이 이곳에 도착하게 되자 이들을 극진히 접대하였다.
1943년 광복군의 국내기반 조성을 위하여 고향인 예천에 돌아온 그는 표면상으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광복군 대원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동년 3월 1일 피체(被逮)되고 말았다.
그는 1943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으로 1945년 8월 17일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음.
▒ 상세설명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장야(長野)・대판(大阪)・명고옥(名古屋)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사진기술을 익히고 귀국하였다. 귀국후 잠시 예천농회(農會) 지도원으로 있다가 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1938년 8월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안동성 임가대(林家臺)에서 사진업을 경영하다가 1940년 8월에 하남성 수무현 초작(河南省修武縣焦作)으로 이전하였다.
이곳에서 사진관을 경영하던 중 1941년 8월 광복군 제5지대에서 파견된 조씨(趙氏, 일본명:松田政茂)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제5지대장과 그 대원들의 연락장소로 자택을 제공하고 비밀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서주(徐州)에서 2명, 북경에서 2명, 택주(澤州)에서 2명 등 광복군 입대 희망자들이 이곳에 도착하게 되자 이들을 극진히 접대하였다.
1943년 광복군의 국내기반 조성을 위하여 고향인 예천에 돌아온 그는 표면상으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광복군 대원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동년 3월 1일 피체(被逮)되고 말았다.
그는 1943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으로 1945년 8월 17일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음.
▒ 상세설명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